날로 진화하는 ‘그놈 목소리’

경찰도 빠지는 ‘보이스피싱’의 늪

2016-12-23     권녕찬 기자

‘햇살론’ 등 저금리 대출 유혹하며 상환 요구 ‘조심’

금융기관, 전화상으로 통장번호 등 개인정보 묻지 않아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현대인의 필수품 휴대전화에 빨간불이 켜졌다. 갈수록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피해가 커지고 있어서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범죄 검거 건수와 피해액은 2012년에 비해 각각 2배 이상 증가했다. 최근에는 경찰 출신이 범죄에 가담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특히 자금 수요가 많은 연말연시에 더 조심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그러나 막상 범죄에 노출되면 평소 생각과 다르게 속수무책인 것이 보이스피싱이다. 방법도 갈수록 교묘해지는 보이스피싱의 수법을 들여다봤다.

보이스피싱 관련 경찰청 자료를 보면 지난 4년간 한 해 평균 5782건의 범죄가 발생했고, 평균 피해 금액이 798억 원에 달했다. 문제는 피해액이 갈수록 증가한다는 점이다. 2012년 595억(5023건), 2013년 552억(2386건), 2014년 974억(4183건), 지난해 1070억 원(1만1534건)으로, 2013년도에는 잠시 주춤했지만 그 뒤로 급증하는 형국이다.

최근에는 보이스피싱 범죄에 ‘경찰관’이 가담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보이스피싱 조직 근절에 앞장서야 할 경찰이 뇌물을 받고 범행을 숨겨주다 못해 직접 보이스피싱 범죄에 뛰어들었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더구나 이 경찰관은 보이스피싱 전담 경찰이었다.

전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보이스피싱 전담 경사 임모(38)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따로 만나 수사 상황을 알려주는가 하면, 입건하지 않거나 선처해주는 대가로 총책에게서 룸살롱 향응을 받고 자신의 집 인테리어 비용을 대납토록 했다.

임 씨는 수사 과정에서 보이스피싱 범죄로 매월 수천만 원의 고수익을 올릴 수 있고, 적발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돼 새로운 보이스피싱 사업을 조직원에게 제안하는 등 범행에 직접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정기관 사칭 지고

금융기관 사칭 뜬다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팀 홍길동 경위입니다. 선생님 금융정보가 노출돼 도박계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계좌도 위험하니 잔고를 모두 국가 안전계좌로 이체하세요.” 이는 수사기관 등 정부기관을 사칭한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수법이다. 하지만 올해는 ‘기관사칭형’보다 금융기관을 사칭하는 ‘대출빙자형’ 수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월 평균 피해액에서 기관사칭형이 차지하는 비중은 57.4%, 대출빙자형은 42.7%였다. 그러나 올해(1~11월) 대출빙자형 피해는 70.4%, 기관사칭형은 29.6%로, 금융기관을 사칭한 대출빙자형 수법이 크게 증가했다. 올 11월까지 대출빙자형 피해 금액은 총 1179억 원, 매월 100억 원이 넘는 피해가 발생했다.

대출빙자형은 미리 입수한 개인정보를 활용, 은행·캐피탈·대부업체 등을 사칭해 저금리 대출을 해주겠다고 접근한 후, 각종 수수료를 받아 챙기는 수법이다. 이들은 “저금리로 대출받기 위해 우선 제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 상환해야 한다”고 속여 피해자들로 하여금 제2금융권 등에서 직접 대출을 받게 한 후 신용도 향상 등 작업비용 명목으로 대출금의 50%를 받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피해자에게 단순히 보증료, 수수료를 받는 수법에서 더 나아간 신종 수법까지 등장했다. 햇살론 등 저금리의 정부지원 금융 상품으로 대출을 갈아타게 해주겠다며 기존 대출금을 사기범이 지정하는 대포통장으로 직접 송금토록 진화한 것이다.

실제 지난 10월 사례를 보면 A 캐피탈 직원을 사칭한 사기범은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연 6%대 금리로 햇살론 대출이 가능한데 현재 신용등급이 낮으니 기존의 저축은행 대출금 1800만 원을 상환해 등급을 올려야 한다고 꾀었다. 사기범은 “기존 대출금을 우리가 불러주는 계좌로 상환하면 햇살론으로 대환처리 해주겠다”고 속여 1800만 원을 입금 받은 뒤 잠적해 버렸다.

개인정보 수집해

상황별 각본 짜 ‘치밀’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은 실제 대부 상담 경력자를 고용하는 데다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자나 전직 대부중개업자 등으로부터 이름, 주민번호, 직업 등 개인정보를 구입한 뒤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짜 범행 성공률을 높인다. 또 사기범들은 생활·사업 자금이 필요한 40대나 제1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저신용자를 집중 공략하는 형태를 띤다.

경찰청 경제범죄수사계 관계자는 “사기범들은 대부상담기록이 담긴 파일을 가지고 그럴 듯한 금융용어를 구사한다”며 “특히 대출상담 경험이 있는 사람은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금리에서 저금리로 전환해 준다거나, 신용등급을 상향해 대출을 유도할 때 등은 꼭 보이스피싱을 의심해야 한다”며 “금융기관이나 수사기관은 절대 전화상으로 통장번호와 비밀번호 등 개인정보를 묻지 않는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겨울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생을 노리는 보이스피싱이 활개를 치고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택배회사 등을 사칭하는 이들은 먼저 아르바이트생에게 급여계좌 등록 목적이라며 통장 및 카드를 요구한 후 이를 대포통장으로 이용한다.

이후 보이스피싱을 통해 사기 당한 제3자로 하여금 피해 금액을 대포통장으로 입금하게 한 뒤, 아르바이트생에게 현금 배달 업무라고 속인 후 사기범에게 전달토록 만든다. 아르바이트 하려다가 졸지에 보이스피싱 범죄의 인출책이 돼버리는 것이다.

사기범은 현금 전달 이유가 세금절감 목적이며 통장을 양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이 아니라며 구직자를 안심시킨다. 금감원에 따르면 11월부터 이달 16일까지 취업사기 관련 제보가 134건에 달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사기범에게 통장·카드를 양도하는 경우뿐 아니라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전달하는 경우에도 민·형사상 책임이 따를 수 있다”며 “인터넷 구직사이트, 생활정보지 등에서 구직할 경우 정상 업체가 맞는지 직접 방문 등을 통해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