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김지하 시인을 뿔나게 했나...세월호·촛불집회 비하글 고발 내막
최초 유포자 찾기 위해 사이버수사대에 고소장 제출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저항 시인’으로 유명한 김지하 시인이 촛불집회를 비하하는 내용의 출처를 알 수 없는 괴문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해당 문서는 최근 언론사 기자들과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문제는 이 글이 김 시인이 쓴 글로 알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요서울]이 확인한 결과 이 괴문서는 김 시인이 쓴 글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김 시인은 2014년 세월호 사고 당시에도 출처를 알 수 없는 글이 시인이 쓴 글로 잘못 알려져 큰 피해를 입었었다. 당시에 문제가 됐던 글도 추후 김 시인이 쓴 글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김 시인의 명예에 큰 타격을 입혔다.
재단 측 “문장·문맥 어색해, 선생님 이름 빌려 다른 사람이 쓴 것 같다”
최초 유포자 찾기 위해 사이버수사대에 고소장 제출
김지하 시인은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시로 유명한 우리나라 대표 저항시인이다. ‘한국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불릴 만큼 사회·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쳐왔다. 그런 김 시인이 세월호를 비하한 글을 썼다고 알려지자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일부 진보진영과 김 시인을 사랑하던 독자들 사이에서는 ‘변절자’라는 소리까지 나왔었다. 그런데 2년 만에 또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언론·촛불집회 비판
김지하 시인이 썼다?
기자가 김지하 시인이 쓴 글로 알려진 정체불명의 괴문서를 접한 것은 지난주다. A4용지 2장 분량의 글은 국내 유력 일간지 사주들을 비난하는 문구로 시작했다. 이어 촛불집회 참여 인원에 대한 비난과 함께 행사비용, 좌파의 정체성, 수구 언론의 대응 등을 문제 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괴문서는 언론사 사주들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이다. 이들 언론사가 촛불집회에 대해 편향적인 보도를 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또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북한의 김정은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글은 촛불집회 참여 인원과 각종 비용을 문제 삼고 있다.
“자발적 촛불시위? 100만, 150만, 225만 촛불시위? 초값은 누가 내주고 시청앞 무대 설치비는? 확성기 값은? 땅끝 해남에서 올라온 농민들 경운기 값은? 그 많은 버스 대절비는? 시위 알바비는? 자발적 참여자들이 더치패이 했다고?”
글 내용은 상당히 자세하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기존 촛불집회를 비판했던 일부 보수진영의 지적이 그대로 담겼다는 점이다. 촛불집회 참여인원수와 무대설치비 등에 대한 의혹은 보수진영 등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배부른 좌파’가
촛불집회 주도한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한 좌파 종북세력들은 노무현때 ‘바다이야기’에서 이미 어머어마한 자금을 확보해 놓았어요. 그건 너희도 다 아는 사실이잖아?”
문서에는 ‘바다이야기 사건’도 등장한다. ‘바다이야기 사건’은 노무현 정부 집권 4년차였던 2006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사행성게임이었던 ‘바다이야기’ 사업 배후에 노무현 전 대통령 조카, 노사모 전 회장, 청와대 행정관, 386인사 등이 인·허가와 도박판 이권에 개입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하지만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이 글에는 과거의 사건을 끄집어 내 현재의 사건과 연결을 시켰다.
지금의 좌파가 ‘옛날 배고프고 가난했던 해방 후 박헌영 때의 남로당 좌파가 아니야’라는 지적이 눈길을 끈다. 지금의 좌파 세력을 ‘배부른 좌파’로 규정하며 이들의 정당성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글이 지금의 좌파 또는 진보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글로 볼 수밖에 없다.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촛불집회의 순수성을 훼손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 예견?
문재인 전 대표도 등장
문서에는 야권의 유력 대권 주자인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 이름도 등장한다. 소위 진보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현 상황이 그대로 흘러갈 경우 차기 대선에서 야권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고 그러면 조만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것으로 전망했다.
‘문 전 대표가 북쪽에 모든 걸 여쭤 본다’는 말은 얼마 전 논란이 됐던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얘기다. 당시 송 전 장관은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2007년 UN 대북인권결의안 표결 준비 과정을 기록했다.
송 전 장관은 당시 ‘찬성’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남북 채널을 통해 북한 의견을 확인해보자고 제안하자 문재인 청와대 전 비서실장이 김 전 국정원장의 건의를 받아 들여 북한에 확인 과정을 거쳤다.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으로부터 쪽지를 받은 후 기권을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지난 10월 언론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이 알려지자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단체들은 문재인 전 대표를 비난한바 있다. 하지만 문 전 대표는 이 같은 사실을 부인했고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과 김 전 국정원장도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이 내용은 일부 언론에서 사실로 보도가 됐고 ‘제2의 NLL 포기 논란’으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였었다.
마무리는
‘보수우파 모여라~’
문서에는 ‘언론자유’를 내세우며 촛불집회 등의 여론에 동조하는 언론을 비판하는 내용이 지속적으로 담겨 있다.
특히 ‘자유’가 있기 위해서는 ‘국가안보가 먼저’라는 논리로 주류 언론을 비판했다. 또 나라가 무너지는데 자유가 무슨 소용이냐며 ‘국가 위기 상황’임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문서의 끝은 “그 많던 보수우파 애국시민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로 끝을 맺었다.
문서 끝에 ‘김지하’라는 이름이 남겨져 있는 이 글은 격정적이면서 호소력 있는 내용이 담겼다. 글 중간중간 과거에 있었던 실제 사건과 인물이 등장하면서 설득력을 더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글이 김지하 시인이 쓴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지하 시인
“이런 글 쓴 적 없다”
기자는 지난 14일 글쓴이를 확인하기 위해 토지문화관을 통해 김지하 시인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글 내용에 대한 확인은 토지문화재단 권오범 사무국장이 김지하 시인과 시인의 부인인 김영주 이사장에게 직접 확인하는 방식을 택했다.
확인 결과 권 사무국장은 “김지하 선생님이나 사모님이 이런 글 쓰신 적이 없다. 어디서 이게 나왔는지 알아보라고 하시더라”며 “문장, 문맥을 봐도 알겠지만 굉장히 어색한 부분이 많다. 어미 부분이 이상한 데가 많다. 아마 선생님의 이름을 빌려 다른 사람이 쓴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권 국장은 “세월호 사태 때도 이런 글들이 유포가 됐었다. 신문에 까지 나와서 큰 문제가 됐다. 그때도 결국 고발을 했다. (글쓴이를) 찾지는 못했다. 블로그에 유포된 것들만 정지하고 없애달라고 요청했었다”고 전했다.
권 사무국장은 일요서울의 취재 이후 타 언론사 취재와 함께 김지하 시인의 지인을 통한 문의가 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지인까지 연락이 오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세월호 때와 마찬가지로 최초 유포자를 찾기 위해 사이버수사대에 고소장을 접수했다고 전했다.
권 사무국장은 김지하 시인 측이 접수한 고소장에는 촛불집회를 비하하는 괴문서 외에 한 건의 문서가 더 있다고 말했다.
권 사무국장에 따르면 이 문서 내용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것이다. 이 또한 김 시인이 직접 쓴 글이 아님에도 김지하 시인이 쓴 글로 알려지며 유포되고 있어 같이 고소를 했다고 말했다.
고령인데다 지병 있어
대외활동 어려워
한편 김지하 시인은 현재 지병으로 대외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건강이 좋지 않다보니 인터뷰를 하거나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다. 고령인 데다 혈압 등 지병이 있고 최근에는 심혈관질환으로 시술도 여러 번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