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 55년 역사의 명암
정재계 자금 통로 vs 경제 발전 이바지
재단지원·선거비자금·정책지원금 등 정권마다 비리 의혹
구본무 LG회장 “해체는 안 돼…헤리티지재단처럼 남겨지길”
[일요서울 | 남동희 기자]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미르·K스포츠 재단 지원을 위한 자금 출원 통로가 전경련이라는 이유에서다.
전경련이 정경유착의 통로라는 비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설립 당시 경제 발전의 중심기구 역할이라는 목적과 다르게 매 정권마다 대기업의 정계 로비 창구로 지탄받았던 전경련의 흑역사를 돌아봤다.
지난 6일 국회에서 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 특위가 9명의 대기업 그룹 총수들을 증인 자격으로 출석시켰다.
참가한 총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 겸 GS그룹 회장이다.
이번 국회 특위에서는 각 기업의 경영상 문제점을 질책하기도 했지만 주요 쟁점은 전경련 회원사인 기업들의 미르·K스포츠 재단 지원자금 774억 원 출원에 강제성이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참가한 총수들은 정부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하며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하다는 거듭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혔다. 특히 자금 출원 통로 역할을 한 전경련은 해체를 강요받으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 부회장은 청문회 도중 전경련 탈퇴와 자금 지원을 중단할 것을 선언했으며, 최태원, 구본무, 손경식 회장도 전경련 탈퇴 의사를 밝혔다. 해체를 반대한 총수들도 친목모임 정도로 환골탈태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업계 일부에서는 전경련의 환골탈태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정권마다 정경유착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전경련은 매번 혁신을 약속했지만 어김없이 정계와의 연결고리로 몸살을 앓았기 때문이다.
태생부터 정경유착의 산물
전경련은 1961년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이자 전경련 1대 회장의 주도하에 설립됐다. 설립 목적은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한 경제인들의 협력 도모를 위해서다. 전경련 회장 직은 이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고 최종현 선경(현 SK그룹) 선대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이 거쳤다.
하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형식적으로는 경제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단체지만 당시 부정 축재 논란을 샀던 기업들이 사면을 받으려 설립해 국가사업을 추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렇기에 정권 때마다 발견되는 전경련과 정계의 비리는 ‘태생적으로 정경유착의 산물’인 전경련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는 것이다.
1988년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일해재단 자금 598억 원이 전경련을 통해 모금돼 비리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의혹이 일었다.
1995년에는 전경련을 통해 모금된 대기업의 돈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 비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회원사 그룹 회장들이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1998년부터 2007년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들어서도 전경련은 10년간 쌀·비료·경공업 원자재 등 4조5000억 원에 해당하는 현물을 북한에 지원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의혹으로 지탄을 받았다.
2002년 일명 차떼기 사건도 삼성, 현대, LG, 한화 등 전경련 회원사가 한나라당에 불법 정치자금 823억 원을 현금으로 가득 채운 트럭 자체를 넘기는 방식으로 제공한 것이 드러나 해체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는 정부가 추진한 미소금융재단 설립에도 전경련이 대기업 자금 출연을 주도해 대가성 모금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현 박근혜정부에서는 지난 9월 미르·K스포츠 재단 자금 모금 문제가 터진 것이다. 이 외에도 지난 4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민간단체인 어버이연합에게 총 5억2300만 원의 자금을 차명계좌를 통해 지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기도 했다.
민간 싱크탱크로 탈바꿈
수차례의 정재계 비리 의혹과 국민들의 날 선 비판에도 이번 청문회에서 허창수·정몽구·구본무·신동빈·김승연·조양호 회장 등 6명의 총수가 전경련 해체 반대의사를 밝힌 이유는 전경련의 순기능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그동안 국가 기간산업을 일으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맏형 역할을 해왔다. 또 서울 올림픽을 비롯한 역사적인 국가 행사 개최도 전경련의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견해다.
이번 청문회에서 삼성, SK 등 주요 그룹의 총수들이 탈퇴 의사를 밝힘에 따라, 전경련이 지난 7일 긴급회의를 통해 쇄신안을 모색했다. 해체 수순을 밟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있었지만 주로 협회 쇄신에 집중했다고 전해졌다.
쇄신안 발표 시기는 특검이 끝나는 2017년 3월 초가 유력하지만, 전경련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은 만큼 국정조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공개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전경련 관계자는 “전경련 조직 개편안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제시됐지만 미국 헤리티지재단과 같은 민간 싱크탱크 형태로 조직을 재정비하는 방안에 의견이 모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홍주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전경련 포함 한국의 협회들은 설립 목적과 역할뿐만 아니라 실체가 불투명한 곳도 많다는 것이 현 사태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라고 꼬집었다.
정 교수는 “유럽의 경우 중세 길드 개념이 현대 협회로 발전했다. 협회들이 길드의 목적처럼 대외 로비용이 아닌 기업의 윤리의식을 강화하고 건전한 경쟁 질서를 지키기 위해 서로 감시하는 목적을 가진다”고 예를 들었다.
또 그는 “최근 유럽에서는 공공기관 포함 일반 기관들도 자기가 누구를 대변하는 단체인지 선언하고 역할을 분명하게 언급해야 하는 법이 도입됐다. 한국 기관·협회도 방향이나 역할에 있어 투명성 강화를 집중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