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후폭풍] 촛불정국, 광화문·청와대거쳐 헌법재판소로…
‘대권 로드맵’은 있어도 ‘민생 로드맵’은 없는 野
[일요서울ㅣ고정현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국정 파행 사태가 기어코 종착역에 도달했다. 이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인을 중심으로 더 이상의 혼란을 피하고 국정을 최소한이나마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데 여야 정치권 모두 협력하는 일만 남게 됐다. 그러나 정작 정치권 내부는 ‘탄핵 이후’라는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한 모습이다. ‘탄핵안 가결’이라는 첫 목표를 달성한 야권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고 나아가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데 혈안이 돼 있는 형국이다.
지난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장악한 야권은 지금껏 탄핵에만 집중했다. 향후 국정을 이끌어 나갈 어떠한 ‘로드맵’도 제시한 바 없다. 박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한 ‘로드맵’만 있을 뿐이었다. 이에 정치권은 탄핵을 주도한 야권이 정국 수습책을 내놓지 못한 채 잇속만 채우려 한다면 분노한 촛불이 그들을 향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 국정 회복 관심 밖인 野… 촛불 방향 바뀔 수도?
- “새누리 혁신 이룬다면 떠도는 보수층 제 집 찾아올 것”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지난 9일 국회에서 가결됐다. 야 3당이 지난 3일 발의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이날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참여해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가결돼 ‘탄핵 정국’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럼에도 정치권 내부에선 ‘탄핵 2라운드’가 시작될 모양새다. 최순실 사태로 빚어진 국정 혼란 수습은커녕 오히려 더 심화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당초 야 3당은 탄핵 정국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왔다.
야권 입장에선 탄핵안이 가결되면 좋고, 부결된다 하더라도 비박계에 책임을 떠넘기면 그만인 게 사실이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년 12월로 예정됐던 대선이 적어도 6개월 이상 앞당겨진 것 하나뿐인 모습이었다. 야권이 탄핵의 ‘캐스팅 보트’를 쥔 비박계의 세월호 배제 요구를 단번에 내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나아가 정치권은 야권의 ‘대권 로드맵’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앞서 박 대통령은 탄핵안이 가결돼도 “헌법재판소 심판 과정을 지켜보며 담담하게 갈 각오”라며 즉각 퇴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야권에서는 탄핵안이 가결될 경우 ‘즉시 하야’를 요구하고 나아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나설 황교안 국무총리까지 ‘탄핵’하겠다며 혈투를 예고했다. 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느냐”며 “찾아보면 다 방법이 생긴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헌법에 따른 대통령 권한 대행 체제마저 흔들려 해…”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역시 “황교안 총리도 책임을 통감하고 물러나야 된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이 부분이 헌법적인 법리에 위배된다는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헌법상으로는 마땅한 방법이 없는 ‘초헌법적 발상’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자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음에도 국정 혼란 사태를 최대한 유지시켜 헌재의 탄핵 결정을 받아 내고 나아가 대통령의 조기 퇴진까지 노리고 있다는 의혹의 눈초리가 짙어지는 모습이다. 결국 이들의 최종 목표는 ‘빠른 대선을 통한 문재인 옹립’뿐이라는 것.
실제로 지난 몇 주간 촛불 집회의 주최측 몇은 야권의 주장과 일맥상통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헌재 심리가 시작됨과 동시에 시위와 집회 장소를 헌재 앞으로 옮길 것이고 동시에 ‘대통령 즉각 하야’도 함께 요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야당 의원들도 힘을 보태고 있다.
“헌재 심리 절차마저 무시하려 해선 안 돼”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길어져 야권이 희망하는 ‘더 빠른 대선’이 불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상황은 야권 본인들이 자초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야권이 지난 2일 발의한 탄핵소추 의결서가 원인이라는 것.
야 3당이 발의한 탄핵소추 의결서에는 11개 항의 헌법 위배 사유와 3개 항의 법률 위배 사유를 적시했다. 그런데 이 탄핵소추 의결서에 적시된 사유 대부분이 추상적이거나 광범위해서 법리적 판단이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야권이 세월호 참사라는 국가적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생명권을 규정한 헌법 제10조 위배를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법조계 관계자들이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1962년과 1980년 개헌 과정이 둘 다 국회를 초헌법적으로 해산한 뒤에 이뤄졌기 때문에,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억지로 인권을 강조하려다 보니 들어간 조항으로 해석된다”며 “극히 추상적인 일반 조항을 탄핵사유로 삼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이 같은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야권의 ‘브레인’들이 탄핵안 가결과는 별도로 박 대통령의 즉각적인 하야에 사활을 걸 것이라고 정치권은 전망한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국민의 여론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야권 인사들이다.
성난 촛불을 더 활활 불태우기 위해 ‘세월호 7시간’ 항목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 때문에 헌재의 심리가 길어지게 된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며 “한시라도 빨리 대선을 치르고 싶은 민주당 입장에선 이제 헌재의 인용 판결을 압박함과 동시에 조속한 판결도 요구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권을 차지하려는 조바심에서 헌법재판소 심리 절차마저 무시하려는 초헌법적 발상을 들먹여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국회의 판단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헌재에 맡겨져 있다. ‘즉각 퇴진’이란 반헌법적 주장을 접어야 한다. 헌재의 판단만이 탄핵 절차의 종결일 뿐”이라며 “탄핵은 지나가는 정치 소용돌이이지만 국정은 영원해야 한다. 대통령의 ‘민주주의 위반’을 규탄한다면서 자신들은 민주주의를 위반하는 행태”라고 꼬집었다.
사실 야권이 청와대가 제안했던 국회 추천 총리를 받았다면 지금 황교안 총리를 대신해 다른 제3의 인물이 국회 추천 총리로서 내각을 관할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권은 이를 무시했다. 야권은 대통령 탄핵을 결정하면서 국무총리 문제를 방치했다. 국민의당 만이 탄핵 전 국회 추천 총리부터 먼저 결정하자며 ‘선총리 후탄핵’을 주장했을 뿐이다.
결국 대통령의 권한은 야권의 전략대로 정지됐다. 그러나 이는 총리를 임명할 주체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야권이 무턱대고 황교안 총리더러 물러날 것을 요청한다면 큰 ‘역풍’에 직면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與, 김무성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을 것”
한편 박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됨에 따라 새누리당 내 분위기는 폭풍전야다. 사실상 탄핵만은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친박계 주류와 ‘탄핵 열차’에 동력을 제공한 비박계 비주류의 불편한 동거 역시 풍전등화의 형세다.
이에 친박계는 비박계 설득을 위해 제안했던 지도부 사퇴 카드를 철회하고 탄핵에 찬성했던 의원들의 탈당을 주장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즉 탄핵에 앞장섰던 비박계 수장 김무성 전 대표가 ‘표적’이 됐다는 것.
반면 비박계 수장인 김무성 전 대표의 속내에는 탄핵 이 전부터 ‘보수 재탄생’을 명분으로 비주류의 집단 탈당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김 전 대표가 대선 불출마 카드까지 꺼내들며 탄핵을 친박-비박을 확연히 갈라놓는 경계선으로 삼은 점이 이를 방증한다.
실제로 김 전 대표 측은 “탄핵을 두고 ‘친박계 당’과 ‘비주류 당’으로 갈렸을 때 보수층이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며 “보수층의 지지가 ‘비주류 당’으로 쏠리는 순간 친박계는 지리멸렬하게 된다”고 자신했다.
즉 김 전 대표는 대통령 탄핵 이후 여권 내 집단 탈당이 이어지면 정치권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 것. 다시 말해 기존의 ‘제3지대’ 밖에 개헌을 매개로 더불어민주당 내 비문 진영과 ‘제4지대’ 세력을 구축하겠다는 의중이 내포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 같은 김 전 대표의 ‘전략’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 대통령 지지율이 4%까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TK(대구·경북)마저 3%대를 기록했다. 새누리당 지지율 역시 곤두박질쳤다. 반면 문재인 전 대표와 민주당은 최근 실시된 모든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보수층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치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문 전 대표의 지지율 상승폭이 크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보수층이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실망감에 부동층으로 떠돌고 있을 뿐 문 전 대표 쪽으로 ‘급커브’를 틀지 않았다는 것. 이에 정치권은 새누리당이 혁신에 성공한다면 보수층이 제 집을 찾아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기존의 보수 성향을 띠던 사람들 역시 “그래도 야당에게 국정을 맡길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보수정권의 재창출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새누리당의 새로운 희망을 창출하는 일이다”며 “앞으로 새누리당 백만인 당원가입운동을 전개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떠도는 보수층을 단번에 제 집으로 불러들일 이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뿐이라는 말이 나온다. 반 총장은 ‘최순실 게이트’ 이후 대권주자 지지율이 2위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1위인 문 전 대표에 버금가는 높은 지지율을 형성하고 있다. 더욱이 여권엔 현재 굵직한 대선 주자가 없는 상황이다. 반 총장의 정치적 행보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