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닮은 ‘쓸쓸한 행복’
2007-10-11
허진호 감독의 <행복>은 뜻하지 않은 공간에서 만난 남녀의 어긋난 사랑을 다룬 멜로다. 감독 특유의 섬세함과 리얼리티가 가득 담겨있어 마치 세밀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간혹 웃음이 나오는 장면에서도 쉽게 웃을 수만은 없는, 먹먹함이 밀려온다.
배우자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응급실 복도에서 만난 남녀의 일탈을 그린 전작 <외출>에 이어 이번엔 요양원 남녀가 주인공이
다. 각각 간경변과 폐농양을 앓고 시골 요양소 희망의 집에 머물게 된 영수(황정민)와 은희(임수정). 약을 사러 간 약국에서까지 여약사에게 수작을 거는 바람둥이 영수는 도시에 찌들대로 찌든 환자다. 딱딱해지는 간만큼 그의 마음도 여유와 쉼표가 없다. 웃
음치료사가 억지로 웃으라고 권하지만 한번 닫힌 마음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영수를 다시 웃게 한 건 이곳에서 8년째 요양 중인 은희. 삶의 낭떠러지에서 만난 둘은 동병상련을 느끼게 되고, 사랑을 확인한 뒤 축복 속에 요양원을 나와 살림을 차리게 된다. 언제 죽을지 몰라 결혼은 생략한, 사실혼 관계는 두 사람의 위태로운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이다.
두 사람의 갈등이 시작되는 건 영수의 병세가 호전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지켜주겠다는 거짓말이 탄로 나는 순간이다. 영수는 헤어진 아내(공효진)를 찾아가 외박을 하고, 다시 술·담배에 손을 대며 두 집 살림을 시작한다. 같은 기간 은희는 객혈을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떠나고 싶은 남자와 보내지 않으려는 여자의 원심력과 구심력이 충돌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