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지키지 못한 사랑

2007-04-06      
금주의 DVD - 가을로

“사라지는 게 아쉽지 않아요?” 우이도의 모래산 앞에서 생전의 민주(김지수)는 그렇게 말했다. 아직 몇 십년은 충분히 그 자리에 있을 자연을 두고 그녀는 조금은 오만하게, 벌써 그것의 사라짐을 슬퍼한다. 사라짐을 붙들기 위해 사진을 찍고 누군가와 함께 다시 돌아갈 것을 기약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모래 알갱이가 다 흩어지기 전에, 그녀의 삶이 먼저 흩어졌다.

결혼 준비를 위해, 현우(유지태)와 민주는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한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현우는 일이 많았고, 하필이면, 민주는 백화점에 혼자 가기 싫다고 말했고, 하필이면, 그 백화점이 ‘삼풍백화점’이었다. 비극은 이처럼 우연의 완벽한 조합에서 탄생한다. 백화점은 무너졌고 현우는 그 순간을 목도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어느 날 현우 앞에 ‘민주와 현우의 신혼여행’이라는 제목의 다이어리가 도착한다. 다이어리 안에는 현우와 민주가 여행하게 될 한국 곳곳의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민주는 너무 일찍 미래의 꿈에 부풀었고, 민주의 숨결이 담긴 다이어리는 너무 늦게 현우에게 도달한 것이다. 현우는 다이어리를 지도 삼아, 정확히 말하자면 민주의 목소리를 따라 홀로 여행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마다 한 여인이 보인다. 그녀는 세진(엄지원)이다. 세진은 하필이면, 10년 전 그 시간, 붕괴된 백화점 현장에서 민주와 함께 사투를 벌이던 그녀이다. 세진과 현우는 서로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다. 현우는 세진에게서 민주를 보고 세진은 현우에게서 민주를 본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인우가 현빈(여현수)에게서 태희를 보았듯 상실한 대상은 이렇게 돌아온다. 이제 이 쓸쓸한 여정에 현우와 세진, 그리고 민주가 동행한다.

이 불가능한 동행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가을로>가 선택한 방식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고 공존시키는 것이다. 현우와 세진의 여정 위로 민주의 목소리가 흐르고 이따금씩 민주의 육체가 현우와 세진의 공간에 들어온다. 이 세 사람은 한 공간 안에 있지만, 민주의 시간은 나머지 둘의 시간과 어긋난다. 김대승 감독은 남겨진 자들의 삶을 다루고 싶었겠지만, 정작 그는 민주라는 유령에게 남은 두 인물의 행로와 영화의 서사를 너무 쉽게 맡겨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