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부 양자로 입적했지만 함께 살지 않았다”

2007-03-27     공주=김현 
[단독공개]정운찬 어린시절 르포
정운찬 전서울대총장이 정치권의 큰 변수로 부각되고 있다. ‘서울대 개혁’, ‘물욕 없는 인물’, ‘품위를 갖춘 자’, ‘경제전문가’, ‘야구 마니아’, ‘금연가’, ‘냉철한 학자’ 등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상당수다. 그런 그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범여권의 새로운 별로 떠오르고 있다.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늘 끼니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한다. 둘째 숙부(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지만 전혀 보살핌 없이 자란 정 전총장. 다른 어린애들에 비해 특출하고 총명했던 그는 행동, 말씨도 남달랐다고 한다. 그는 60여평생을 살면서 삶의 스승은 생부(生父)인 친부, 양자로 입적해준 숙부,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조순 전한은총재 4명이었다고 말한다. <일요서울>은 정 전총장이 태어난 충남 공주 탄천면 분강리 마을을 3월 21일 직접 찾아가 마을 주민들을 만나봤다.



정 전총장이 태어난 고향은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의 한 시골마을이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다름 아닌 공주시 탄천면 분강리 마을.

분강리는 공주시에서 1시간 30여분을 더 들어가는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버스는 하루에 오전 9시, 오후 3시반, 저녁 6시 단 3번만 오고가는 곳이
다. 말 그대로 주변이 전부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이다.

지난 3월 21일 <일요서울>은 정 전총장이 유년시절 살았던 분강리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는 정 전총장의 어릴 적의 집인 ‘사랑방’만이 현존하고 있었다. 이날 마을 대다수 주민들은 장구를 배우러 가는 날이어서 거의 집을 비운 상태였다.

분강리 마을로 20살에 시집와 줄곧 살고 있다는 현용순 할머니(84)는 정 전총장의 어린 시절 모습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알기로 운찬이는 참 힘들게 살았지. 덕지리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이곳 분강리로 와서 밤나무 밑 초가집에서 가족들과 힘겹게 살았거든. 그러다가 이곳 사랑방에서 살기도 했고. 하루하루 먹을 끼니가 없어서 어려웠지. 운찬이는 어릴 때 얼굴이 동그랗고 이뻤어.”

이 마을 이정순 할머니(74)는 “운찬이가 고생 많이 했지. 양아버지(둘째 숙부 정윤원)가 딸만 넷이어서 아들이 없어 대를 잇지 못하니 운찬이를 양자로 입적했거든. 하지만 전혀 보살피지는 못했어. 너무 가정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야”라고 회상했다.


막내로 태어난 늦둥이

정 전총장은 아버지 정창성씨와 어머니 이경희씨의 다섯 남매 (형 정운혁(어릴적 이름 정수길), 큰누나 정운기, 둘째 누나 정등운, 셋째 누나 정분자, 정운찬)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정 전총장의 어머니는 43살 무렵에 그를 낳았다. 늦둥이를 둔 것이다. 어머니는 당시 워낙 나이가 들었고, 6·25사변을 겪었던 터라 아이를 유산하기 위해 익모초를 먹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 전총장은 아주 튼튼하게 태어났고, 건실하게 자랐다. 어릴 때도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말투도 점잖았고, 머리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숙부 양자로 입적

정 전총장이 태어난 이후 둘째 숙부 정윤원씨는 딸만 넷을 둔 탓에 그를 양자로 입적했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정 전총장을 입적만 시켰을 뿐 전혀 보살핌은 없었다는 게 마을 주민들의 말이다. 양아버지 집안 또한 살림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 전총장의 친아버지는 그가 9살 되는 해에 돌아가셨다. 지금은 탄천면 국동리에 선친의 묘소가 있다.

분강리 마을 주민이 기억하는 정 전총장의 아버지는 준수한 외모에 ‘선비’타입의 인물로 기억한다. 항상 두루마기 차림으로 마을을 다녔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린 정 전총장에게 매사 ‘자네’라는 존칭어를 사용하며 항상 존대해줬다고 한다. 정 전총장의 아버지는 ‘선비’, 양아버지는 원래 ‘농부’였지만 ‘뱃사공’을 하며 그날그날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았다는 것이다. 버거운 생활이었다.

분강리에서 분강식당을 경영하는 유근덕(67)씨는 정 전총장과는 친인척 사이다. 정 전총장의 둘째 고모인 정정숙씨의 넷째 아들.

<일요서울>은 이날 마을 주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정 전총장의 친인척인 유씨를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유씨는 정 전총장에 대해 “친척이긴 하지만 자주 만나볼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5년 전에 한국전력공사를 다니던 운찬이 형(정운혁)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대전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 한전에 다녔던 직원들이 작업복 차림으로 문상을 왔는데 그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소줏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다시 봤다”고 말했다.

유씨는 정 전총장의 어릴 적 모습에 대해 “운찬이는 부모님이 엄하게 키워서 그런지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행동도 거칠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순은 인생의 아버지

분강리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다는 정 전총장은 4km나 떨어진 먼 거리까지 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정 전총장과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는 마을 주민 박인규(67)씨는 “운찬이는 나보다 어렸지만 조용하고 말도 함부로 하지 않았던 아이였다.

먼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도 다른 아이들과 심하게 장난치거나 말썽부리는 일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박씨는 또 “운찬이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고 하는데 대통령이 되기는 어렵지 않나. 좋은 시대는 아닌 것 같다. 내 고향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현실은 매우 어렵지 않는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정 전총장의 또 다른 선배인 이영희(66)씨는 “운찬이 가정형편을 아는데 참 힘들게 살았다. 물론 그 당시에는 6·25사변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어렵게 살았고, 쌀이 없어 죽을 쑤어먹는 일이 많았다. 그 때는 누구나가 다 힘든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정 전총장은 분강리 탄천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서울로 가족과 상경, 창경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때도 항상 1등자리를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우등생이었던 그가 경기중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초등학교 동기생의 아버지인 이영소 전서울대교수의 도움으로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 전총장은 운도 좋았다. 그가 총명했던 만큼 그의 주변엔 그를 도와주는 지인들이 많았다. 경기중학교 시절 영국출신 캐나다인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도움을 받아 중학교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과는 서울대 캠퍼스 커플

경기고등학교를 입학할 무렵에는 직접 돈벌이를 했다. 고1 때부터 입주과외를 시작했다. 그는 인생에서 행운과 기회가 여러 번 찾아왔다. 66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그곳에서도 또 다른 인생의 기회가 주어졌다. 바로 그의 스승인 조순 전한국은행총재와의 만남이었다. 인생의 소울메이트인 부인 최선주(57)씨와 결혼에 골인하게 된 것도 조 전총재의 적극적인 도움 때문이었다.

정 전총장은 대학시절 부인 최선주씨를 처음 만났다. 서울대 캠퍼스 커플로 연애를 시작했지만 결혼하는 데는 여러 난관이 따랐다. 정 전총장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보고 장인, 장모가 결혼을 쉽게 승낙하지 않았기 때문. 정 전총장은 70년 대학을 졸업하고, 조 전총재의 추천으로 시험을 치르지 않은 채 한국은행에 말단사원으로 입행하는 행운을 안았다.

하지만 그의 꿈은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조 전총재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 1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부인 최선주씨와 결혼할 수 있었던 계기도 조 전총재의 중재덕분이었다. 장인이 반대하는 결혼을 조 전총재가 나서서 설득했기 때문이다.


주량 소주 한 병에 야구광

1973년 결혼한 정 전총장은 현재 장남 정준택(30)씨와 장녀 정윤지(25)를 슬하에 두고 있다. 평소 부인 최선주씨는 언론을 통해 “남편이 술을 잘 못 마시고, 좋은 사람이어서 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 전총장은 소주 한병 정도는 마실 만큼 주량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물론 현재 담배는 피지 않고 있다. 학자인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야구광’이기도 하다. 직접 잠실구장을 찾을 정도로 열성팬이다. 유독 분석에 취미를 느끼는 것도 매사 경제학이든 정치든 분석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교수를 거쳐 서울대 총장(2002.7~2006.7)까지 역임한 그의 궤적을 살펴보면 정말 예사로운 삶은 아니다.


배영준 US아시아 한국지사장과 40년지기

정치권에선 김근태 의장과도 친분이 두텁다. 김 의장과는 경기고와 서울대 1년 선후배 사이. 또한 배영준 US아시아 한국지사장과도 40년 지기로 막역한 관계다. 배 사장의 처제와 정 전총장의 부인 최씨 역시 절친한 친구 사이다. 정 전총장과 배사장과의 인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정 전총장은 입주과외를 하던 시절, 배 사장의 처제를 가르치던 선생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도 이들과의 인연의 끈은 남다르다.

그의 주변측근들은 “그는 물욕이 없고 깨끗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서울대 개혁을 주도할 만큼 경영능력도 갖췄다는 평가다. 그는 총장시절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데 역점을 뒀다. 서울대를 세계대학 100위권 안에 진입시킬 만큼 캠퍼스 성장에 주력한 인물로 통한다.

그런 그가 이제는 대선후보감으로 주목받고 있다. ‘정운찬 효과’가 과연 발휘될 수 있을까. 고1때부터 입주과외를 시작한 그가 서울대 총장을 거쳐 이제는 대선후보감으로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있다.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대선으로 가는 길에 그의 사생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분강리 마을에 정체모를 사람들 출현

<일요서울>이 공주시 탄천면 분강리 마을 주민 현용순 할머니를 만나던 3월 21일, 정운찬 전총장의 어릴 적 발자취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취재기자가 방문하기 이틀 전에도 이 마을에는 50대 남자와 30~40대로 보이는 남자 4명이 방문을 했다는 것이다.

현 할머니는 “이들 남자들이 어릴 적에 정 전총장이 살았던 사랑방을 기웃거리며 정 전총장의 양아버지 산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며 “산소를 찾아 사진을 찍고자 한다는 말을 하더라”고 말했다. 그래서 마을주민들끼리 “조심해서 말을 해야겠다는 말까지 주고 받았다”고 했다.

분강리 마을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공주 향교의 전교(총 책임자)인 유재민(84)씨는 정 전총장의 어릴 적 모습을 이렇게 회고한다. “운찬이가 지금 나를 보면 기억할지 모르겠다. 운찬이는 몸이 마르고 참 약했는데 뒤통수는 튀어나와 생김새가 특이했다. 목이 가늘었던 기억도 난다. 참 총명했다.”

유씨는 정 전총장이 득배(부인을 잘 만남)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머리가 좋아 어린 시절 힘든 삶을 살았지만 대단히 성공한 경우라고 말한다.


##공주시민들 “정운찬 누구지, 얼굴부터 알려야지”

<일요서울>은 취재당일 정운찬 전서울대 총장의 고향인 충남 공주시 탄천면 일대 주민들을 만나 정 전총장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그러나 공교
롭게도 공주시에선 정 전총장의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공주 향교의 최고 책임자인 유재민(84)씨는 “열린우리당 탈당파모임 의원들은 정치적인 꿈을 지닌 사람들이다”며 “그런 의원들이 정계진출을 부추기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이들 의원들이 (정 전총장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만한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정순원(64) 공주 향교의 사무총장은 “이 전시장은 지지율이 매우 높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승리하면 대통령으로 당선될 확률이 가장 높지 않겠느냐”며 “정 전총장은 사실 인지도도 낮고, 공주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충청도 발전을 위해 먼저 애써 달라”고 했다. 사실 <일요서울>이 공주시내 시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몇몇 택시기사나 버스운전 기사 등을 찾아 취재했지만 정 전총장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 상태였다.

고속터미널 근처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김모(46)씨는 “(정 전총장은)최근 뉴스 보도를 보고 알았다. 정계진출을 하려면 우선 공주시에 얼굴을 내밀고, 먼저 누구인지를 알리는 것이 순서 아니냐”며 “그런 약속 없이 불쑥 정계에 진출해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고향에서도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쓴 소리를 했다.

공주 교육대에 다닌다는 한 대학생(21)은 “나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잘 나라를 이끌 것 같다”며 “(정 전총장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