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심상치 않은 상황 … 사과 필요”
2004-03-31 김종민
열린우리당과 청와대는 당초 ‘탄핵’을 5개월 전의 ‘재신임’과 비교, 야당의 무리수가 역풍에 부딪힐 것이며 재신임 당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섣불리 발의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상황을 비교적 낙관적으로 전망했다고 한다.민주당과는 달리 탄핵안 발의에서부터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던 한나라당의 모습도 이 같은 낙관적 전망에 힘을 실어줬다.그러나 청와대와 우리당의 전망이 빗나가기 시작한 것은 소장파와의 내부갈등으로 탄핵발의에 소극적이었던 한나라당 지도부가 탄핵 강행으로 급선회하면서부터. 배경에는 9일 오전 이회창 전총재의 3번째 대국민 사과가 있었다. 그리고 이날 오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합세, 소속의원 159명의 서명을 받은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접수됐고, 열린우리당은 국회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열린우리당과 청와대는 야당의 ‘제스처’ 정도로만 인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0일 여권이 예상했던 분위기와는 다른 양상이 급격히 빚어졌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등 지도부는 이후 강경 분위기를 이끌었고 수도권 소장파들의 반대 목소리는 강경파 의원들의 거센 비난에 잦아들었다. 민주당 역시 소장파와 추미애 의원이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탄핵처리 대열에 합류했다. 결국 이날 밤 8시께 정동영 의장이 청와대를 방문하기에 이르렀고, 2시간 동안 밀담을 나눈 것으로 확인됐다. 여권의 ‘위기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2시간여 동안 노대통령과 정동영 의장이 나눈 이야기는 어떤 내용일까.이날 밤 정동영 의장은 노대통령에게 “상황이 심상치 않다”며 야당의 강경 분위기를 전했다고 한다.또한 “완곡한 표현일지라도 사과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정동영 의장은 노대통령으로부터 “알았습니다”라는 답변을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뿐만 아니라 정동영 의장의 ‘심상치 않은’ 상황에 대한 설명에 “네, 네”라며 경청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이후 면담을 마친 정동영 의장은, 자신의 건의가 수용됐다고 생각하고 소속 의원들이 농성중인 국회본회의장으로 돌아가 “기자회견이 좋은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고 전하며 탄핵안이 철회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11일 오전 1시간 넘게 특별기자회견을 가진 노대통령은 회견 초기 “책임을 통감하며 거듭 머리 숙여 사과한다”고 밝혔지만, 야당이 요구하는 ‘사과’는 하지 않았다. 대신 측근비리에 대한 옹호적 발언과 총선결과와 재신임 문제를 연계하겠다는 등의 또 다른 카드를 던졌다.
특히 노건평씨의 인사청탁 문제를 해명하면서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을 언급함으로써 남 전사장이 집을 나가 한강에 투신, 최대 악재가 되고 말았다.이후 청와대와 핫라인을 유지해오던 정동영 의장이 발 벗고 나섰다. 정동영 의장은 11일 밤 여러 채널을 가동해 야당 대표들을 상대로 심야회동을 제안, 12일 새벽까지 형식과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회동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야당은 “대화는 물건너 갔다”며 강행방침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정동영 의장은 12일 아침 “대국민 사과와 함께 남 전사장에 대한 유감·위로 메시지가 나와야 한다”며 청와대에 긴급 타전을 했다고 한다. 처리시한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대통령은 김우식 비서실장에게 전하는 형식으로 “잘잘못을 떠나 죄송하게 생각하며 남 전사장 투신에 대해서는 가슴 아프고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힘으로써 정의장의 건의에 화답했다.
그러나 12일 오전 11시를 갓 넘겨 경호권 발동으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장석에서 끌려나가고, 표결이 시작되면서 청와대와 국무총리, 관련 부처가 긴박하게 움직였다.청와대 비서실은 오전 11시40분쯤 경남 창원에서 대통령 로템공장 현장방문 일정을 수행하던 윤태영 대변인과 천호선 의전비서관 등에게 전달됐고, 11시55분쯤 탄핵 가결 사실이 전해졌다. 이때까지는 탄핵안 통과소식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았으며 공장방문을 마치고 오찬장으로 가는 차안에서 대통령에게 보고가 이뤄졌다.이 과정에서 고건 총리는 11시30분쯤 김우식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가결시 준비사항을 논의했다. 오전 11시50분쯤에는 NSC사무처에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NSC는 최악의 사태대비 법률적 검토 및 준비를 마쳤으며, 가결시 외교안보분야와 관련 국무조정실과 업무조율을 하기로 했다.
탄핵안이 가결된 다음인 12시쯤 고총리는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국민불안을 감안, 신속한 처리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맘때쯤 노대통령은 경남 창원 로템사 근로자들과의 오찬자리에서 인삿말을 통해 “제가 직무정지가 되는데 오늘 저녁까지는 괜찮다”고 비교적 담담히 반응했다. 권양숙 여사는 경남지역 주요 여성단체장들과 오찬에서 민심이 선택한 대통령인데 임기 5년동안 받쳐줘야 성숙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이처럼 2시간여에 걸친 밀담과 전화접촉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의 기자회견 방향이나 탄핵안 처리과정이 정동영 의장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관측이다.사실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는 국회에서의 탄핵안 처리 대책을 놓고 미묘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론조사에서는 대통령 선거중립에 관한 선관위 결정과 관련, 대통령이 사과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반대의견의 2배 이상으로 나타났지만 노대통령은 “부당하고 비이성적인 야당의 탄핵발의 과정과 결과를 의연하게 지켜보겠다”며 말 그대로 ‘의연하게’ 맞섰다.노대통령은 또 야당이 탄핵안을 발의한 직후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의 통화에서 김대표가 “표의 유·불리를 떠나 국가적 혼란을 막는 게 중요하다”며 표결 봉쇄 의지를 밝힌 데 대해“굳이 물리력으로 저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11일 기자회견에서도 “국회가 자유롭게 표결해 달라. 열린우리당도 당당하게 표결에 임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려다 참모들의 만류로 참았다고 전해진다.야당 일각에서 탄핵안 가결 뒤 거센 역풍을 맞고 “우리가 노 대통령이 놓은 덫에 걸린 것 아니냐”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도 이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지지자들의 마음속에 폭풍이 몰아치도록 해 결집시키는 데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비춰지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