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취재] 보건복지부-전복협, 복권기금 논란 내막
“10년 기다리면 풀어줄게”…돌연 “구두약속 없었다”
[일요서울 | 신현호 기자] 지난 6월 9일 세종시 보건복지부 앞에 300여명의 인파가 모였다. 이들은 복지부를 향해 “10년 전 약속을 지켜달라”며 피켓을 들어올렸다. 전국 사회복지시설의 시설장들로 구성된 이 단체(전국복권기금지원시설대책협의회·전복협)는 벌써 2년째 복지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 과거 미신고시설 양성화 정책에 따라 지원금을 받은 게 화근이 됐다. 당시 지원 조건이었던 ‘근저당권 설정’을 두고 양측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10년간의 족쇄(근저당)에서 해방될 날을 기다렸던 시설장들은 복지부가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하는 반면, 복지부 측은 “애초에 약속은 없었다”고 일축했다.
논란의 단초가 된 사연은 지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전국의 미신고시설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였다. 같은 해 충남 부여의 한 미신고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해 시설장과 거주인 3명이 사망한 게 계기가 됐다.
조사 결과는 참담했다. 미신고시설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인권유린 및 운영상의 비리 등은 사회적인 문제로 급부상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부는 미신고시설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오기로 했다. 같은 해 정부는 미신고시설 양성화 정책을 내놨다. 기존의 미신고시설들을 신고시설로 전환하거나 전환이 불가능한 시설들은 폐쇄하겠다는 게 골자였다.
남다른 사명감을 안고 복지시설을 꾸려나가던 시설장들에게 시설 폐쇄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치였다. 이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시설 운영을 이어 가기 위해 정부의 정책에 기대기로 했다.
논란의 씨앗 ‘복권기금’
문제는 자금이었다. 신고시설로 전환하려면 일정 자격 요건을 충족해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안전시설 및 건물 증·개축 등의 보수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신고시설들은 재정 형편이 녹록치 않았다.
정부도 이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정부는 지원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개인시설에 세금을 투입할 수 없다는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재원은 복권기금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복권기금의 35%는 매년 법정 사업에, 65%는 소외계층 공익사업에 쓰인다. 일부 민간자본도 투입됐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지원금을 받은 시설의 건물에 대해 10년간 근저당권을 설정하기로 한 것이다. 복권기금을 다른 곳에 사용하거나, 곧바로 건물을 매각하는 등 재산권 행사를 할 우려 때문이었다. 당초 설정 기간을 30년으로 잡았지만, 시설들의 반대로 10년으로 확정됐다.
이후 지원 사업은 착착 진행됐다. 사업을 주관한 보건복지부는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로부터 복권기금을 받아 각 지자체에 하달했다. 지자체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총 1040억 원(민간자본 100억 원 포함)의 지원금을 900여개의 복지시설로 전달했다. 각 시설들은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었고, 증·개축 및 시설 개·보수, 전세자금 등에 활용됐다.
양성화 정책은 지자체 안팎에서 호응을 끌어냈다. 신고시설은 급증한 반면 미신고시설은 큰 폭으로 감소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켰다. 시설들 역시 장밋빛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미신고라는 딱지를 떼고 거주자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역연계 및 시설확장 등 장기적인 사업플랜도 세웠다.
각 시설들은 성과와 무관하게 묵묵히 사업을 이어오며 근저당설정이 해지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건물이 노후되는 데다 입소자들이 낙후된 시설을 원치 않아 운영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우후죽순으로 생긴 신고시설 때문에 경쟁이 치열해진 탓도 있었다. 투자는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
일부 시설은 이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시설에는 예비 거주자들이 입소를 꺼린다는 이유에서다. 왕래가 편한 곳을 찾는 입소 희망자들을 대비해서라도 목 좋은 곳을 알아본 시설들도 있었다.
10년간 채워진 족쇄
2004년부터 2년에 걸쳐 차례로 배분된 지원금은 지난 2014년부터 하나둘 만기가 도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지일이 다가올 즈음 문제가 터졌다. 어찌된 영문인지 복지부가 근저당권 설정 10년을 더 연장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다. 이를 원치 않으면 지원받은 금액의 5%를 가산해 환수조치하겠다고 했다.
시설장들은 어리둥절했다. 10년을 기다린 계획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판이었다. 이들은 약속을 어겼다며 즉각 반발했다. 전복협이 발족된 것도 이 시기다.
전복협은 “복지부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고 성토했다. 당시 복지부 직원들은 전국을 돌며 사업 설명회 및 공청회 등을 열었다. 전복협에 따르면 이들은 이 자리에서 10년 후 근저당권 설정을 반드시 해지해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이에 대한 녹취록이나 계약서는 따로 받아두지 않았다. 이들에게 복지부 직원의 말은 곧 정부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시설장들이 확실한 근거를 남겨야 하지 않느냐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지만 복지부 측이 거듭 약속을 하자 믿기로 하고 지원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근거 안 남겼다 ‘부메랑’
그러나 이런 믿음은 화살이 돼 돌아왔다. 보건복지부 측은 전복협의 주장에 대해 애초에 10년 뒤 해지해주겠다는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보건복지부의 최호용 사회서비스자원과 사무관은 “알아본 바로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없다. 지침에도 그런 내용이 없다”면서 “미신고시설은 형사고발 대상이다. 시설을 합법화시키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한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이어 “복권기금은 국가 돈이다. 원래 그냥 주는 돈이 아니다”라고 못 박은 뒤 “그런 근거가 있으면 가져와 달라. 합리적인 사안이 있어야 반영하지 않겠느냐”라고 선을 그었다.
전복협은 그러나 최초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전복협 관계자는 “수백명의 시설장들이 다 들었다. 어떻게 모두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면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느냐. 알았으면 당연히 녹취록을 남기거나 계약서를 받아뒀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 순진했다”고 하소연했다.
현재 최 사무관이 해당 사업을 맡고 있지만 당시에는 다른 직원(박모 당시 주무관)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 직원은 현재 담당업무가 바뀌었다.
[일요서울]은 당시 주무관과 전화통화를 하기 위해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다. 내선전화는 통화 중이거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 역시 연결되지 않았다. 복권기금 관련 문의할 게 있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자 “해당 문의는 최 사무관과 논의하라”는 답이 왔다. 당시 근저당 설정을 10년 뒤 해지해주겠다고 말한 사실이 있는지를 묻자 더 이상 문자는 오지 않았다.
주목할 부분은 이번 논란에 석연찮은 구석이 몇 가지 있다는 점이다. 박 전 주무관 등은 전복협의 수차례 해명 요구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전복협 측은 3차례에 걸쳐 질의 요청서를 내용증명으로 박 전 주무관 등에게 보내 답변을 요구했다. 3차 답변 기일인 지난달 25일까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상황이다.
전복협 관계자는 “이는 ‘의제자백’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의제자백은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자백하지 않더라도, 명백히 다투지 않거나 기일에 불출석 또는 답변서를 제출 의무기간 내에 제출하지 않은 경우 그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간주하는 법률 용어다. 복지부 주장대로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왜 답변을 거부하는지 의문이라는 게 전복협의 입장이다.
일부 지자체는 해지해줘
미심쩍은 부분은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일부 지자체가 근저당권을 해지해준 사례가 있었다. [일요서울]이 입수한 춘천시의 공문에 따르면 시는 지난해 3월 25일 A시설에 계약일로부터 10년이 되자 해당 시설에 설정된 근저당권을 풀어줬다. 계약 당시 기간을 10년으로 한다는 내용의 공문도 시설로 보낸 바 있다. 이는 당시 보건복지부가 약속을 했다는 증거라는 지적이다.
당시 공문을 작성한 춘천시 관계자는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보건복지부 매뉴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임의대로 10년으로 정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해당 매뉴얼은 폐기된 상태다.
같은 도 횡성의 B·C·D·E시설은 각각 지난해 6월 17일, 9월 25일, 11월 9일, 12월 8일 등 차례로 근저당권이 해지됐다. 정선의 F시설도 같은 해 12월 16일 해지됐다.
전복협에 가입되지 않은 경기도의 한 시설 관계자도 해당 지자체로부터 같은 내용의 설명을 듣고 지원금을 받았다고 했다. 이 시설 관계자는 “시청 직원이 지원금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10년 뒤 해지해준다고 분명히 말했다”고 했다. 이는 ‘복지부의 약속’이 전복협만의 주장이 아니라는 얘기다.
전복협 측은 또 최초 계약서에서 추가된 부분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협회는 “(복지부) 담당 직원이 각 지자체에 시설장들과 계약 체결을 하도록 보낸 공통지원계약서 조항(계약의 효력발생 및 기간)에 시설장들과의 합의를 깨고 ‘당사자의 협의하에 연장할 수 있다’는 문장을 추가했다”고 주장했다. 이 의혹에 대한 답변 요청도 앞서의 내용증명에 포함된 내용이다.
복지부 측은 현재 대책을 마련 중이니 기다려 달라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늦지 않은 시간에 대책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복협의 다른 한 관계자는 “우리가 바라는 건 다른 거 없다. 근저당권만 좀 해지해 달라”면서 “더 잘해보려고 하는 거다. 사명감을 가지고 10년을 버텼다”고 토로했다. 이어 “현재 (우리 시설이) 재정상황이 좋지 않다. 시설이 노후돼서 거주자들이 다 떠나고 있다”면서 “대책을 마련한다고 한 지가 벌써 2년이 됐다. 말만 하지 말고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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