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첼시 리, ‘국가 간 공문서 인증(아포스티유)제도’ 이용해 ‘혈통 사기극’ 벌여
‘사문서 위조’로 특별귀화 파문…아포스티유 맹신
2016-06-17 장휘경 기자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의혹’이 결국 ‘사실’이 되고 말았다. 한국이 국제적인 망신을 사게 됐다.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국내 선수 자격을 인정받은 하나은행의 여자농구선수 첼시 리가 자신과 아버지의 출생증명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이 검찰 수사결과 밝혀진 것. 중요한 점은 첼시 리의 ‘혈통 사기극’의 중심에 국제적으로 서류를 보증하는 아포스티유(Apostille) 제도의 허점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검찰에 따르면 첼시 리는 지난 해 5월과 10월 하나은행에 자신과 아버지의 출생증명서를 위조해 제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특별귀화를 위해 위조된 서류는 올해 4월 법무부 국적과에 제출됐다.
첼시 리가 입국할 때부터 불거진 ‘혼혈아’ 의혹과 이에 대한 잇따른 제보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결과 첼시 리의 출생증명서상의 아버지는 실존하지 않는 인물로 확인됐다. 검찰은 또 첼시 리의 서류 상 할머니가 한국인인 것은 맞지만 첼시 리와는 관계가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결국 첼시 리는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인 셈이다.
첼시 리는 부모나 조부모가 한국인이면 국내 선수와 같은 자격을 준다는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의 규정에 따라 외국인이지만 국내에서 해외동포 자격으로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하나은행은 지난 시즌 외국인 2명을 보유하는 효과를 보며 정규리그 2위를 차지하는 행운을 안았다. 첼시 리 역시 신인왕을 비롯해 득점, 리바운드, 공헌도 1위를 차지했다. 첼시 리가 ‘혼혈아’가 아님이 드러남에 따라 2015-2016시즌 여자프로농구의 팀과 개인 기록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느냐를 놓고 앞으로 뜨거운 논란이 따를 전망이다.
아포스티유, 허점 많아
첼시 리가 사문서를 위조할 수 있었던 것은 아포스티유 제도의 허점 때문. 아포스티유란 한 국가의 문서를 다른 국가에서 사용하려고 할 때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확인해주는 문서다. 국제적으로 해당 서류를 보증하는 일종의 국가 간 공문서 인정제도인 셈. 따라서 아포스티유를 제출할 경우 대부분 해당 서류가 진본인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즉, 서류의 진위 여부를 다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첼시 리의 에이전트는 이 점을 이용했다. 출생증명서만 위조하면 진위 여부 확인 절차 없이 서류상의 이름과 공증인의 이름만을 확인한 다음 아포스티유를 발급한다는 사실을 악용한 것.
WKBL이 “하나은행이 서류에 대해 현지 국가가 발행한 문서를 추가적인 확인 없이 자국에서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인정하는 아포스티유를 발급받도록 했다”고 해명한 데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WKBL은 첼시 리의 에이전트가 제출한 아포스티유를 믿었다. 대한체육회 역시 서류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아포스티유만을 믿고 첼시 리의 특별귀화를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아포스티유의 허점을 악용, 사기극을 벌여 억대에 가까운 돈을 챙긴 일당도 있다. 지난 2010년, 토지매매 관련 서류를 위조한 후 아포스티유 위조 기계까지 구입해 소유자가 확실하지 않거나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부동산을 가로챈 사기사건이 발생했다. 사기범들은 주인이 분명하지 않은 토지를 미국 시민권자의 소유인 것처럼 위조한 뒤 자신들이 땅을 사들인 것처럼 매매계약서 등을 다시 위조해 가로채는 수법을 썼다.
성적표, 졸업장, 경력증명서, 재산증명서, 범죄경력서, 결혼 증명서 등의 위조된 서류는 미국에서 어렵지 않게 아포스티유를 발급받을 수 있다. 발급 절차가 간단하기 때문이다.
지난 해 자녀의 학교성적표에 대한 아포스티유를 발급받고 귀국한 A씨는 “아포스티유를 발급받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는다”며 “마음먹고 서류만 위조하면 아포스티유를 받는 것은 일도 아니다“고 폭로했다.
A씨에 따르면 아포스티유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주청사에 가거나 우편으로 신청하게 되는데, 직접 방문할 경우 공무원이 그 자리에서 제출한 서류 상의 이름과 해당 서류를 공증한 공증인의 이름 및 직인만 대조해 확인한 뒤 아포스티유를 발급한다. 즉, 서류의 진위여부는 확인하지 않고 이름과 직인 정도만 확인하는 것.
한국에서 학원을 운영하기 위해 외국대학 학위에 대한 아포스티유를 교육청에 제출한 B씨 역시 “귀국하기 전 주청사에 들러 학위증명서의 아포스티유를 받는 데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며 “교육청에서도 서류의 진위 여부는 확인하지 않고 아포스티유만 제출하면 학원 운영을 승인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육청 관계자는 “아포스티유는 국가 간 공문서 인증제도이기 때문에 아포스티유를 제출하면 일단 그 서류는 믿을 수밖에 없다”며 아포스티유 이상의 확인 절차는 거의 밟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제2의 첼시 리 막으려면?
그렇다면 제2의 첼시 리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포스티유에만 의존하지 말고 제출된 서류의 진위여부를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일이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아포스티유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는 기관들이 실질적인 확인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서울의 한 대학 관계자는 “학생들로부터 아포스티유를 받기도 하지만 이후 서류의 진위 여부를 알기 위해 해당 학교에 직접 팩스로 확인하고 있다”며 아포스티유 제도의 악용을 막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간제약이라는 벽 때문에 사실상 확인 작업이 쉽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한 대학 관계자는 “우리도 매년 아포스티유 소지 학생들을 받고는 있지만 확인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며 “현재로서는 진본 서류만 제출받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아포스티유와 함께 제출되고 있는 서류 중 상당수가 사본이어서 학교 성적표의 경우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다. 학교 직인까지 인터넷으로 검색해 진짜처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표를 해당 학교로부터 직접 봉인된 상태로 받아야 위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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