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 미제사건] 피해 할머니 “나는 죽었던 사람…범인 꼭 잡아달라”
마을 전체가 흉흉한데…“진범만 웃고 있다”
[일요서울 | 신현호·권녕찬 기자] 2010년 10월 25일 충북 증평의 한 마을. 한밤중 홀로 살던 70대 할머니의 집에 괴한이 침입했다. 그는 잠들어 있는 할머니를 목 졸라 기절시킨 뒤 성폭행하고 도주했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할머니를 방에 두고 불을 지르고서다. 다행히 할머니는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빠져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집 전체가 소실돼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범인의 계획대로였다.
6년 전 가까스로 탈출한 피해 할머니가 범인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건 없을까. 당시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용의자 DNA 시료는 이미 모두 사용한 상황. 유력 용의자를 찾아내더라도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인 물증이 없다. 때문에 할머니의 기억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기자는 피해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해당 마을을 찾았다. 마을 경로당에서 만난 윤모(85) 할머니는 “(피해 할머니가) 그 사건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고 엄청 고생했다”며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범인을 아직도 못 잡았는데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잡을 수 있겠나”라고 걱정했다.
이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집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생활한다고 말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문을 잠가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윤 할머니는 “이 작은 동네에서 이런 일이 생겨 무서워서 살겠나. 문을 잠가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집에) 들어올 수 있다. 시골집이 그렇지 않나”라고 했다.
“아직도 고통스러워…원수 갚아달라”
당시 사건 현장인 할머니의 집은 현재 전부 소실돼 고구마 밭이 돼 있었다. 할머니는 마을 안쪽의 다른 집에서 거주 중이다. 홀로 사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작은 마을이어서 피해 할머니를 모르는 어르신은 없었다. 주민들의 도움으로 만난 박 할머니는 마을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다가 정자에서 휴식 중이었다. 그날의 끔찍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게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범인을 꼭 잡기위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 할머니는 범인의 특징이 기억나는지 묻자 “나는 죽었던 사람”이라면서 “죽은 사람이 뭘 알겠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했다. 박 할머니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할머니가 이날 기억하는 건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불길뿐, 범인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없었다. 잠이 든 상태에서 정신을 잃은 탓이다.
청각장애 2급인 같은 마을 80대 할머니 살인 피의자 신모(58)씨의 특징도 할머니의 기억에는 없었다. 같은 마을에 거주하던 박 할머니와 신 씨는 마을의 한 농장에서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박 할머니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범인이 누구인지 당장 알았을 터였다.
박 할머니는 “이 동네 농장(고추밭)에서 고추 꼭지를 따는 일을 몇 번 같이 했다. 또 같은 동네 사니까 서로 모를 수가 없다”고 했다. 이어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난다. 범인이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른다”고 재차 강조했다. 할머니는 최근 다시 받은 경찰 조사에서도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다만 이 할머니는 누구보다 범인이 잡히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이날 사건으로 왼쪽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의 중상을 입었다. 박 할머니는 “아직도 다친 곳이 욱신거린다. 더 큰 고통은 그날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다. 꼭 범인을 잡아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당부했다.
주목할 점은 신 씨에 대한 주민들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일부 할머니들은 아직도 신 씨가 그런 범행을 저질렀다고 믿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할머니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인데 이런 짓(80대 할머니 살인)을 저질렀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면서 “항상 인사 잘 하고 일도 잘 도와주고 하는데 사람이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다른 할머니는 ‘범인도 못 잡는다’며 경찰을 꾸짖었다. 이 할머니는 “CCTV 없었으면 거기도 범인 못 잡았다. 처음에는 자연사라더니 경찰이 못 잡은 범인을 유족이 잡은 거다. 경찰보다 CCTV가 낫다”고 지적했다.
최근 유사사건 발생…피의자 연관성 있나
6년이 지난 현재 이 사건은 미제로 남아 있다. 그러던 중 최근 같은 마을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15일 신 씨는 이 마을에 사는 한 80대 할머니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목을 졸라 살해하고 성폭행한 뒤 달아났다.
경찰은 수법이 비슷하고 홀로 사는 노인을 범행 대상으로 삼은 점 등을 이유로 신 씨가 6년 전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경찰은 당시 확보한 DNA와 이번 사건 피의자인 신 씨의 유전자를 분석했다.
그러나 6년 전 범인의 치밀한 계산이 발목을 잡았다. 그의 DNA는 화재 때문에 온전치 못했고, 남성만 갖고 있는 Y염색체(부계 혈족)만 동일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신 씨와 조상을 같이 하는 집안의 남성은 Y염색체가 모두 같다는 얘기가 된다. 인근 지역에 사는 신 씨 성의 남성이 모두가 용의자인 셈이다.
경찰은 먼저 신 씨의 친형과 친동생을 용의 선상에 두고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뚜렷한 진술이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진범이 자수하지 않는 이상 수사를 통해 범인을 검거하는 건 사실상 어렵다는 지적이다. 청각장애 2급인 신 씨를 조사하는 데 제약이 많은 데다, 신 씨가 80대 할머니를 살해한 사실은 시인하면서도 성폭행 방화사건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어 수사는 난항을 겪고 있다.
경찰 “끝까지 추적한다”
경찰은 신 씨의 신병과 수사기록을 검찰에 넘기는 것으로 수사를 일단락 지은 상황이다. 사건을 수사 중인 괴산경찰서는 신 씨에게 살인 및 강제추행, 절도, 주거침입 등의 혐의를 적용해 지난 1일 청주지검에 송치했다. 6년 전 사건은 증거를 찾지 못해 이날 검찰 송치 과정에서 빠졌다.
다만 경찰은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진범을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것이다. 당시 사건은 강간치상과 방화 두 가지 혐의가 적용됐다. 강간치상의 공소시효는 15년, 방화는 10년 등이다.
공소시효는 두 가지 중 형량이 무거운 범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이다. 여기에 사건 해결의 결정적 증거가 나오게 되면 10년 더 연장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공소시효는 25년이 된다.
경찰은 공소시효가 충분하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신 씨 주변 인물을 중심으로 수사망을 좁히겠다는 계획이다. 경찰은 광범위하더라도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 거주 지역과 동종 전과 여부 등을 확인할 방침이다.
괴산경찰서 관계자는 “피해 할머니가 피의자의 얼굴을 전혀 알지 못하고, 당시 사건 현장에서 찾은 DNA도 극소량이어서 수사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면서 “이 사건은 전담팀을 꾸려 신 씨를 상대로 계속 수사를 벌일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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