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기 감원 바람 충격
댁의 남편은 출근하십니까?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쉬쉬하던 산업계 구조조정이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총선에서 야권이 승리하면서 기업 구조조정은 급물살을 타는 분위기다.
특히 조선과 해운은 적자 규모가 수조 원대에 이르는 등 벼량 끝에 몰려 더 이상 구조조정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이렇다 보니 무더기 감원도 불가피한 상황이다. 가계를 걱정하는 한숨이 커지고 있다.
올해 3만 명 추정…포항·울산 조선소 찬바람
업황 좋아질 기미 안보여…정부 대책 나올까
“출근하세요?”라는 말이 집 주변에서 듣는 인사가 됐다. 20여년 넘게 해운업계에 종사한 A부장(50)은 최근 가장 많이 듣는 말이라며 하소연한다.
회사 구조조정 이야기가 복수의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이같은 말을 듣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A부장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 중에는 이런 인사에 적응된 듯 본인 스스로도 아침마다 질문하게 된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일 없어 줄도산 우려
울산과 포항 등 조선소가 즐비한 지역에서 이같은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울산 지역에서 소규모 조선소를 오랫동안 운영했다는 C씨(64)는 “3년 전부터 수주 물량이 현저히 떨어지더니 올해는 작년 수준의 절반이 되지 않는다”며 “나뿐만 아니라 주변 조선소들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차라리) 이번 기회를 통해 문제의 조선소 정리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소규모 업체끼리 경쟁하다 줄도산으로 이어지는 만큼 차라리 업황정리로 살아남을 곳만 살아 명맥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런 바람은 C씨뿐 아니라 주변 소규모 조선조 대표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조선소를 그만두고 나왔다는 D씨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조그마한 상점을 차리려고 한다”며 “호시절만 생각하고 돈을 모으지 않은 동료들 중에는 회사 잃고 가족까지 잃은 사례가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문제는 이 같은 일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조선업 불황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앞으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직장을 잃는 사람 또한 늘어날 전망이다.
울산과 포항 지역에서는 대낮에도 술에 취한 사람이 보인다고 지역상인들이 전한다. 이들 대부분은 조선업 종사자들인데 일이 없다 보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술판을 벌인다는 것이다. 그러다 말 실수라도 하면 주먹다툼까지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서로 이해하는 분위기라고도 한다. “오죽했으면”이라는 관용이다. 조선업의 경우 과거 호황일 때 현금을 두둑히 챙겼다면, 지금은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로 전락한 만큼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포항에서 주류업을 하고 있는 E씨(35)는 “술을 먹기 위해 오는 사람들 대다수가 조선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대화내용을 들어보면 조선업의 호황기를 회상하는 일들이 많다”며 “신변을 비관하는 사람들이 많고 우리 아버지, 옆집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쓰럽다”고 전했다.
“고용지원 마련” 글쎄
정부도 이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구조조정 업종 고용지원방안’ 마련을 고심 중이다.
정부는 지난달 24일 비공개 경제현안회의(청와대 서별관회의)를 열고 산업별 구주조정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조선·해운·철강·건설·석유화학 등 5대 부실업종 중 조선과 해운부문에 대해 집중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키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이와 함께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하다면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이틀 뒤인 26일 ‘산업·기업 구조조정협의체’ 회의를 열고 경기민감산업의 구조조정 진행상황과 향후 계획을 논의한후 관련 내용을 발표했다.
금융위원회 고위관계자는 “경제현안회의 결과 5대 부실업종 중 조선과 해운부문에 대해 집중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키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안다”며 “특히 해운 부문을 정상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해운 부문에서 용선 문제를 못 풀면 청산할 수밖에 없다”며 “그러나 지금 분위기는 선사들도 용선료 협상 등에 도움을 주려 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날 경제현안회의에선 고용조정이 예상되는 업종의 고용유지 지원 방안과 실업 발생 시 정부의 신속한 취업지원 방안 등도 논의됐다.
양대 노총도 이같은 우려에 대해 “경제위기와 경영실패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구조조정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승철 민주노총 사무부총장(대변인)은 “지금의 경제위기를 불러온 건 정부의 잘못된 산업정책과 사용자들의 그릇된 경영 때문”이라며 “이제 와서 위기가 심각하니 노동자들에게만 책임을 지라는 건 수용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부실경영을 한 경영진과 수년간 경영상태와 상관없이 재벌·대기업 위주로 업종 전반을 재편하는 구조조정을 뒷받침했던 정부가 1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김준영 한국노총 홍보선전본부장은 “노사 간 충분히 협의가 이뤄져야 제2의 쌍용차 사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기업이 진짜 어렵다면 인력감축 말고도 다양한 내부 자구노력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예컨대 조선업종에서는 장기적으로 고부가가치 기술인력을 길러내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경영자들이 새로운 수주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김 본부장은 “기업이 비전을 제시한 다음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도 늦지 않다”며 “노동계는 실노동시간 단축에 초점을 맞춰야 실업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방안에 대해 구조조정을 앞둔 종사자들이 체감하는 온도를 낮추기는 어렵다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2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수술이 무섭다고 안 하고 있다가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구조조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연일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정부가 직접 개입하겠다”며 신속하고 강력한 구조조정 추진 의지를 분명히 하면서 업계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