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칭 사기’의 진화…“눈뜨고 코 베인다!”
모르면 당하는 사칭사기 백태
무작위 전화 걸어 지인 사칭…의심 피하려 ‘개명’
땅·집주인 행세하며 금품 갈취 “신고만이 예방책”
[일요서울 | 신현호 기자] ‘사칭사기’의 수법이 갈수록 고도·지능화되고 있다. 경찰과 검찰, 금융회사 등을 사칭해 조직적으로 벌이는 사기는 널리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가까운 지인이나 주인행세 등을 하며 접근하는 이른바 ‘네다바이(교묘하게 남을 속여 금품을 빼앗는 사기범죄)’ 사기꾼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히 이들의 범행 수법이 날로 교묘해지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구인광고지에 게재된 여성피해자들의 연락처로 무작위 전화를 걸어 11명의 피해자들로부터 현금, 명품의류 및 귀금속 등 6000여만 원 상당을 편취한 A(50·남)씨가 사기 혐의로 지난 18일 구속됐다.
수법은 이랬다. A씨는 지난해 9월 11일 벼룩시장 구인광고 면에 실린 피해자 B(50·여)씨의 연락처를 확인했다. 그는 공중전화로 B씨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누군지 알겠어?”라고 물었다. B씨가 “혹시 XX사장님 아니세요?”라고 하자 A씨는 곧바로 ‘XX사장’ 행세를 하며 “일본에서 재벌회장 아들이 1박2일로 서울에 오는데 가이드를 해줄 젊은 여성을 소개해 줄 수 있겠느냐”고 범행을 시도했다.
B씨는 A씨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장이라 생각하고 피해자 C양(23세·여)을 추천했다. 그러자 A씨는 B씨에게 C양이 모 호텔에서 회장 아들을 만날 준비를 하게했다.
A씨는 “회장 아들이 가이드 비용으로 1000만 원을 지급할 계획인데 우리도 작은 선물을 준비해야한다”면서 B씨에게 먼저 300만 원을 C양에게 송금하도록 했다. 그는 다시 C양에게 전화를 걸어 B씨가 보낸 현금 300만 원과 옷가지 등을 쇼핑백에 넣어 택시로 실어 보내게 하는 수법으로 금품을 빼돌렸다.
A씨는 이 같은 수법으로 총 지난해 9월부터 올 3월가지 9개월간 총 9차례에 걸쳐 11명의 여성피해자들로부터 현금 1600만 원, 명품의류·시계·귀금속 등 총 88점(4540만 원 상당)을 가로챘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공중전화를 이용해 하루에도 수백 통의 전화를 걸어 범행 대상을 물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피해자가 속아 넘어가면 생각을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수십 차례 전화를 걸어 피해자들의 의심을 피했다.
재벌회장 아들을 소개받아 금전적 이익이 생길 수 있다는 피해자들의 기대 심리를 이용하고, 직접 대면하지 않고 피해금품만을 택시에 실어 보내게 하는 수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지능적인 수법이라는 지적이다.
경찰 관계자는 “날로 진화하는 사기범죄를 예방하려면 의심되는 전화를 받았을 경우에는 다시 상대방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유사한 피해가 발생할 경우 경찰관서에 신고해야만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의심 피하려 개명
사기를 치기 위해 이름까지 바꾸는 정성(?)을 보인 사기꾼이 적발되기도 했다. 최근 실제 토지 소유자의 이름으로 개명한 후, 공시지가(약 60억 원)보다 싸게(약 16억 원) 판다고 해 6억 원을 편취한 허모(68·남)씨가 사기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허 씨는 지난해 5월 서울 한 지역에 있는 임야의 주인 이름과 같도록 개명허가를 받았다. 이후 지난해 12월과 올 3월경 2명의 피해자들에게 공시지가보다 싸게 팔겠다고 꼬드겼다. 허 씨는 피해자들과 동행해 토지 등기부등본과 인감증명서를 발급 받고 법무사 사무장까지 동원해 2회에 걸쳐 총 4억 원을 가로챘다.
경찰 조사 결과 허 씨의 범행에는 브로커가 개입돼 있었다. 허 씨는 이전 건설일을 하다가 많은 빚을 진 상태에서 독촉에 시달리던 가운데, 브로커가 “이름을 개명해 땅을 팔면 2억 원을 준다”는 말을 믿고 범행을 저질렀다.
허 씨는 피해자들에게 받은 4억 원 중 1억5000만 원은 개인 채무를 갚거나 유흥비, 법무사 사무장에게 수고비 등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2억5000만 원은 공범에게 줬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이에 대한 추가 수사가 필요한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동대문경찰서 관계자는 “1984년 7월 이전 등기부등본에는 토지소유자의 주민등록번호가 필수기재사항이 아니어서 이를 악용한 범행”이라면서 “동일한 피해를 예방하려면 매매하려는 토지가 있는 장소에 직접 방문해 실제 소유자가 누구인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건물·땅주인 사칭
서울시내 전역의 커피전문점을 돌며 돈을 받아 가로챈 사기꾼이 구속된 사건도 있었다. D씨(55)는 올 2월 6일 양천구 목동에 있는 한 커피전문점에서 업주가 없는 틈을 이용해 ‘건물주’를 가장해 여종업원으로부터 전기료 명목으로 돈을 받아 도주했다.
D씨는 종업원인 E양에게 자신을 건물주라고 소개한 뒤 “전기료를 받으러 왔다”면서 9만 원을 요구했다. E양은 당시 점주가 퇴근한 뒤여서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D씨는 “이미 점주와는 이야기가 다 됐다”며 “인수증을 써줄테니까 돈을 일단 달라”고 E양을 안심시키고 결국 돈을 받았다.
그러나 D씨는 남성은 건물주가 아니었다. 그는 서울 시내 일대를 돌며 같은 수법으로 사기를 치는 ‘네다바이’ 사기꾼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D씨는 지난해 11월 28일부터 3개월간 양천구와 강서구, 송파구, 중구, 도봉구 등 서울시내 커피전문점 등을 돌며 적게는 9만원에서 많게는 47만원까지 총 13차례에 걸쳐 모두 310만원을 갈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카페와 편의점, 당구장 등에 홀로 남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어린 사회초년생들을 주로 범행 대상으로 삼고, 건물주나 상가 관리직원을 사칭해 임대료 혹은 전기요금 명목으로 돈을 요구했다. 돈을 건네길 주저할 때는 가게 사장과 통화하는 척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서울 양천경찰서는 D씨를 상습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 조사에서 D씨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뜯어낸 돈을 화상경륜장·경마장 등에서 탕진했다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D씨는 사회 경험이 없는 사회초년생, 특히 20대 초반 여성 아르바이트생들을 주요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며 “유사 수법에 당하지 않도록 업주들과 아르바이트생들이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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