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혈경쟁’피하려다 ‘피’보게 생긴 건설업체
‘평창고속철도담합’ 대형건설사 4곳 압수수색 들어가
2016-04-22 변지영 기자
띄어쓰기, 글자크기까지똑같은입찰사유서내
뿌리뽑히지않는고질병…입찰제전면개정시급
[일요서울 | 변지영기자] 19일 검찰은 평창 올림픽 기반 시설인 ‘원주-강릉 도시고속철도 사업’입찰 과정에서 입찰 담합 정황을 포착해 주요 건설사 4곳을 압수수색했다. 건설업계는 입찰 제도상 담합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며 지나친 과징금 산정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정부는 입찰 제도 개선의 일환으로 ‘종합심사낙찰제’를 도입할 예정지만 이미 건설업계에 깊게 뿌리내린 입찰 담합 관행을 해소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검찰은 지난 2013년 4월 ‘원주-강릉 도시고속철도 사업’입찰 과정에서 주요 4개 대형 건설사 간 담합 혐의를 포착해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검찰이 압수 수색한 곳은 현대건설, 두산중공업, KCC 건설, 한진중공업이다.
이 사업은 2013년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2017년인 내년 개통을 목표로 발주한 공사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대비해 수도권과 강원권을 잇는 고속 철도망 설립 사업으로 58.8km에 이르는 구간과 9376억 원 규모의 건설 사업이다.
어떻게 담합했나
한국철도시설공단은 2013년 당시, 7개의 공사 구간 사업자를 선정했다. 그러나 감사 결과 일부 담합 정황이 불거졌다. 입찰에 참여했던 4개 건설사가 사전에 가격을 미리 의논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건설사들은 7개의 공사 구간 중 4개를 각각 한 개씩 수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입찰 과정에서 자신의 회사에 배당된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의 입찰 사유서에 고의적으로 탈락할 수밖에 없는 금액을 써냈다. 그 결과, 각 회사가 1개씩 공구를 맡을 수 있었다.
철도공단 관계자는 당시 건설사들 임원을 불러 담합 여부를 물었지만 모두 부인했다고 전했다. 그는 “심증은 있었지만 발주처에선 조사권이 없어 계약을 철회할 수가 없었다”며 “이에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했다”고 말했다.
금액만 다른 입찰 사유서
각 회사가 발주처인 철도시설공단에 제출한 입찰 사유서 내용이 모두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글자 크기부터 띄어쓰기 등 금액을 제외한 문서의 양식이 각 건설사의 입찰 사유서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같았다. 철도공단 관계자는 “4개 업체가 입찰금액 사유서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과 양식이 모두 동일했고 입찰 담합을 의심할 만한 투찰 패턴이 나타났다”면서 “입찰 사유서 양식이 맞춘 듯 같다는 것은 담합이 오래된 고질병이라는 것을 방증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당시 입찰에 참여했던 건설사는 입찰 사유서 내용 및 양식이 같은 이유를 “일종의 관행”이라며 반박했다. 입찰 금액을 적어 내는 사유서가 수십 장에 달하는 보고서가 아니라 한두 쪽 정도의 간단한 내용만 담아내는 것이라 건설사들이 서로 참고한 것뿐이라는 입장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사유서를 낼 때 건설사들끼리 서로 어떻게 냈는지 물어보고 대충 맞춰서 낸 것이지 어떤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며 “문제는 부당한 행위가 있었는지 여부인데 사유서의 양식이 같다고 담합이라 한다면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건설업계 관행 묵인한 정부
철도공단의 관계자는 똑같은 사유서 내용을 관행이라고 안이하게 치부하는 것은 이미 그전에도 꾸준히 담합이 있어왔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이미 이 사업은 3년 전 사건인데 지금 검찰이 조사를 강화하는 이유가 의문이다”라며 “지난해 정부에서 특별사면으로 입찰 제한 조치를 풀기도 했다”며 하소연했다.
정부가 담합을 묵인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난해 8.15 특별 사면으로 정부는 입찰 담합으로 제재를 받고 있는 70여 개의 업체를 비롯해 2천여 개의 건설 업체를 사면했다. 대규모 사면은 2012년과 2006년에도 있었다. 당시 정부는 ‘정상적 기업 활동으로 서민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위축된 건설 경기 정상화 및 일자리 창출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사면을 허가했다.
숱한 처벌과 단속에도 건설업계의 입찰 담합 비리가 관행으로 굳어진 것은 정부의 솜방망이식 처벌과 특별 사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건설사 측은 정부가 특별사면을 해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년 전 공사 담합을 근거로 터무니없이 높은 과징금을 물게 하고 입찰 제한을 시도한다는 것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무엇보다 가뜩이나 악화된 사업 환경에 건설사의 경영 부담까지 키운다는 것이 불만이다.
건설업계 제도 개선 시급
건설업계에서는 입찰 담합을 하지 않는 기업이 없을 만큼 고질적이다. 이처럼 담합 입찰과 처벌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는 벌금 비용보다 수익 창출이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기업 건설사의 경우, 입찰 담합으로 적발되어도 과징금, 형사 처벌 및 입찰 제한 등 제재가 상당 부분 상쇄되기 마련이다. 대기업 건설사에 제재를 가하면 해외 수주와 국내 건설 공사가 큰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대부분의 건설사들이 과징금과 1~3년 정도의 처벌을 받고 별문제 없이 공사를 진행해 온 것으로 보인다.
건설업계 안에서 입찰 제도를 전면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공공기관에서 발주하는 입찰 제도는 최저가 낙찰제로 진행하고 있다. 이는 가장 낮은 가격을 써내는 건설사에 공사를 맡기는 방식이다. 결국 예산을 절감하려는 발주처도 이 제도를 통해 담합을 유도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번 4‧13총선 이후 정부가 건설업계의 병폐를 타파하고자 칼을 빼들었다. ‘원주-강릉 도시고속철도 사업’단합 관련 수사에 착수했고, ‘한국가스공사 액화천연가스(LNG) 저장탱크 사업’ 입찰 담합에도 역대 최고 과징금을 물릴 예정이라 건설업계는 긴장하고 있다.
또 올해부터 국가와 공공기관에서 발주하는 300억 원 이상의 공사에는 최저낙찰제 대신 ‘종합심사낙찰제’(종심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종심제는 업체의 공사 수행능력과 사회적 책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최종 낙찰업체를 선정하는 제도다.
철도공단 관계자는 “올해 3건의 공사 발주가 처음 종심제를 통해 입찰할 예정이다”라면서 “그렇지만 담합을 관행으로 보는 건설사들의 낡은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종심제도 유명무실한 제도에 멈출 것”이라고 우려했다. 출혈 경쟁을 부추겼던 현행 입찰 제도 개선이 고질적 병폐로 이어왔던 건설업계의 담합 근절에 기여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