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뿐인 백의종군 회장님들의 불편한 약속
[일요서울|강휘호 기자] 한때 산업계 전반에서 회장님들의 무보수 책임경영 실천의 바람이 불었다. 어떤 이들은 실적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무보수를 선언했고, 또 다른 회장님들은 고액 연봉이 알려져 여론의 눈치를 보다가 반납하기도 했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결국은 대부분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실적회복과 회사 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들이 고액연봉을 포기한 대신 주식과 배당소득만으로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과 엄청난 홍보를 하고난 뒤 은근슬쩍 또 다시 연봉을 받아가고 있어 진정성에는 의문이라는 견해도 다수 존재한다.
배당금으로 주머니 채우다가 은근슬쩍 무보수 경영 철회
진정성 ‘의문’…기업 관계자 “배당은 배당, 연봉은 연봉”
무보수 책임경영 실천의 시작을 알린 경영인은 이건희 회장이다. 불법 비자금 조성 혐의로 2008년 4월 자리를 떠났던 이건희 회장은 2010년 3월 특별사면을 받아 경영 일선에 복귀한 뒤 무보수를 선언했다.
정몽규 회장은 2013년 실적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4년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바통을 이어 받아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GS건설에서 보수를 받지 않기로 했고, 허명수 부회장과 전문 경영인 임병용 사장 등도 GS건설 무보수 경영에 돌입했다.
아울러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경영난을 지나고 있던 한진해운에 대해 흑자 전환 전까지 무보수 경영을 하겠다고 나섰고,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역시 연봉을 ‘1원’이라고 알렸다.
2013년 말 301억 원의 보수로 ‘연봉왕’에 올랐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수감 이후 연봉 전액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한 사례도 있다. 마찬가지로 수감됐다가 풀려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보수 331억 원 중 급여 200억 원을 반납했다.
이후로도 다양한 기사와 홍보를 통해 이들의 무보수 경영은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져 왔다. 실제 ‘최태원 회장 책임경영…작년 무보수 근무’, ‘한진해운, 조양호 책임경영 체제 아래 흑자 기조 일궜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실적악화에 책임지겠다”’ 등이 모두 이들의 무보수 경영을 알려주는 기사의 헤드라인들이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무보수를 선언한 이들 회장들의 기대와는 다소 엇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어차피 주식소득이나 배당소득이 천문학적 액수인데, 연봉 정도는 그들에게 푼돈 아니냐는 의견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연봉을 지출하지 않았으면 그 액수만큼 회사 발전에 투자를 해야 하는데, 아낀 돈이 어디로 갔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배당금만 보더라도 비판적인 견해를 뒷받침한다. 정몽규 회장은 무보수 선언을 했을 당시, 현대산업개발의 경우만 놓고 봤을 때 5억1350만 원(13.63%, 주당 50원)의 배당금을 받았다. 2011년과 2012년에도 각각 72억 원과 21억 원의 배당금을 가져간 바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올해 2월 24일까지 공시된 상장사 배당(보통주 기준) 현황을 집계한 결과 무보수 선언을 했던 회장 대다수가 상당히 많은 수입을 취하고 있었다.
연봉 없어도 배불러
우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772억원으로 가장 많은 현금배당을 받는다. 이건희 회장은 3.38%의 지분을 갖고 있는 삼성전자에서만 997억 원의 배당금을 쥐었다. 또 삼성생명(보유 지분 20.76%)에서 747억 원, 삼성물산(보유 지분2.86%)에서 27억 원을 챙긴다.
그 외의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560억 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84억 원, 허창수 GS 회장 66억 원으로 서로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다. 조양호 회장은 지난해 10대 그룹 총수 중 배당금 증가율이 전년과 비교해 가장 높았으며 그 차이는 5배에 육박했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의 조사결과도 비슷하다. 30대그룹 오너 일가가 올해 받은 배당금은 약 9500억 원으로 작년보다 24%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현대차·LG그룹 등 3개 그룹 오너 일가의 배당금이 30대그룹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해당 자료에서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800억 원가량으로 1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3위를 차지했다. 더불어 30대 그룹 중 총수가 있고 배당을 한 23개 그룹의 배당금은 총 11조1601억 원으로 집계됐다.
배당금 가운데 총수일가가 받은 배당금은 9478억 원으로 8.5%를 차지했다. 2014년보다 23.7%(1813억 원) 급증했고 비중은 0.3%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사실상 이들이 연봉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막대한 부의 창출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이렇다 보니 일부 전문가들은 “대주주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는 것은 부익부를 지향하는 것이다. 배당금 자체가 대기업의 부익부를 유지해가려는 계책인 동시에 소득재분배를 외면하는 행위”라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아울러 이들이 무보수 경영을 철회하고 보수를 받고 있지만 무보수 경영을 선언할 때와는 달리, 최소한의 공시를 통해서만 사실을 알리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말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제출한 주요 상장기업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9억5000만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51억4936만 원을 받았다. 최태원 SK 회장도 연말부터 임금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OOO 회장 무보수 경영 철회’ 라는 제하의 홍보물이나 기사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무보수 경영은 한 때에 지나지 않았고 그마저 배당금 등을 통해 주머니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상황과 비판에 대해 잘못된 해석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보수를 선언했다가 올해 이를 철회한 기업 중 한 곳의 관계자는 “배당금은 주주 모두의 권리인데 이를 회장님의 무보수 경영과 연결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또 “평생 돈을 받지 않고 일할 수는 없지 않느냐”, “무보수 경영을 하겠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며, 그 다짐이나 상징성만으로도 충분히 인정할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연봉으로 지출되지 않은 금액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선 “애초에 지출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렵다”는 해명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