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⑤ 김춘추와 연개소문

외교는 또 하나의 국력이다

2016-03-21     이범희 기자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다섯 번째로 ‘김춘추와 연개소문’편이다. 

 

백제는 관산성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함으로써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7세기로 넘어오면서 신라에 대한 복수전은 더욱 심해졌다. 이 복수전은 위덕왕과 무왕대에 계속되었지만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의자왕은 신라의 서쪽 지역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성주인 품석과 그의 아내를 살해했다.

이 일은 신라에게 큰 충격이었고, 특히 김춘추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죽은 품석과 그의 아내는 다름 아닌 그의 딸과 사위였다. ‘삼국사기’에는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가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하였다”고 했다. 김춘추는 바로 이때부터 보다 활발하게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김춘추는 진평왕대 경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용춘은 진지왕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천명 부인은 진평왕의 딸이자 선덕여왕의 언니였다. 이렇듯 진골 출신인 그였으나 중고기의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한 사륜의 후손이었다. 사륜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장자인 동륜이 일찍 죽자 동륜의 아들인 백정을 제치고 진지왕이 되었다. 그러나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방탕하다는 이유로 왕좌에서 쫓겨나고 그 대신 백정이 진평왕으로 즉위하였다. 이어서 그의 딸과 조카가 선덕여왕·진덕영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사륜 계열은 왕위계승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진평왕은 사륜의 아들인 김용춘을 내성의 사신에 임명하여 사륜 계열들의 불만을 해소하려 했으나 이를 반대하는 구귀족들이 있었다. 진평왕 53년, 불만을 품은 칠숙과 석품이 결국 모반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일은 사전에 발각되어 오히려 사륜 계열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선덕여왕대에 김춘추가 문희와 결혼하여 신흥세력은 더욱 상승세를 탔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백제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김춘추는 원한을 갚고자 고구려에 가서 보장왕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보장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 고구려의 실권자는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성이 천씨요 아버지는 동부의 대대로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발견된 남생의 묘지명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아버지 태조와 조부 자유는 모두 막리지를 역임하였으며 병권을 잡고 나라를 움직였다. 그의 집안은 이미 여러 대에 걸친 호족이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태어난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스스로 물 속에서 났다고 선전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뤄 보아 대단히 독재적이고 오만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이 아버지가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으려하자 사람들은 그가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하락하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며 사람들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흉악무도해지자 대인들은 몰래 왕과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죽이려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연개소문은 부병을 모아놓고, 대신들을 잔치에 초대해서는 모조리 죽여버렸다. 내친 김에 그는 영류왕까시 시해하고 왕의 조카를 세우니 이가 곧 보장왕이었다. 그러나 반대파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안시성주였던 양만춘은 연개소문의 집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그를 공격하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양만춘은 연개소문을 집권자로 인정하고 연개소문은 그에게 안시성주의 지위를 보장하는 선에서 매듭지었다.

허수아비 왕을 내세운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막강한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 ‘구당서’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연개소문은 수염과 얼굴이 매우 준수하고 걸출하였다. 몸에는 항상 칼을 다섯 자루 차고 다니는데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말을 탈 때는 언제나 하인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이를 밟고 탔으며 말에서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의장대를 앞세우고 선도자가 큰 소리로 행인을 물리쳤다. 이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어 모두 숨을 죽였다”

또한 연개소문은 불교를 배척하고 도교를 장려하였다. 국민정신을 개혁하고 독재 정권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 정책에 불교 승려는 물론 많은 귀족들이 반발하고 나섰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무력으로 잠재웠다. 그래서 보덕 같은 승려는 이를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654년, 진덕영왕이 재위 8년 만에 죽자 누구를 왕으로 할 것이냐는 문제가 생겼다. 유력한 후보인 상대등 알천이 왕위를 사양하자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했다. 이것으로 권력이 구귀족 계열에서 김춘추·김유신 계로 옮겨갔다.
김춘추는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자신의 아들 문왕과 인문을 각각 시중·군주 삼아 친정체제를 다졌다. 그리고 대당외교를 더욱 강화하여 나당연합군을 구성하였다. 나당연합군은 660년, 드디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김춘추는 딸과 사위의 원한을 갚았지만 긴장이 풀린 탓일까. 백제가 멸망한 지 채 1년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연개소문은 이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기 위해 고구려는 막대한 물자를 소모하였다.
독재 권력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연개소문도 보장왕 24년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후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남생·남선·남산 등이 권력쟁탈전을 벌이자 이 틈을 타고 당군이 침입해 고구려도 멸망하였다.

신라는 이후 당군을 반도에서 몰아내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신라는 대동강 이남 선으로 영토를 확정했고 이를 삼국통일이라 부르는 것이다.

당나라와 손을 잡는 신라

김춘추와 연개소문. 신라와 고구려를 대표한 두 라이벌의 대립과 갈등은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김춘추의 개인적인 복수심과 연개소문의 무리한 요구는 결국 북쪽의 고구려 당을 중국에 빼앗긴 채 불안전한 통일을 이룩하게 하였다.

만약 두 사람이 좀 더 원대한 뜻을 가지고 넓은 시야에서 서로 협조하며 함께 발전해나갔더라면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지금보다 훨씬 웅대해졌을 것이다. 돌이켜 볼수록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