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스포츠계를 뒤덮은 러시아 도핑 스캔들…멜도니움 공방
[일요서울 | 김종현 기자] 지난해 육상 도핑 파문으로 홍역을 앓았던 러시아 체육계가 최근 종목을 가리지 않고 도핑혐의가 적발되면서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특히 지난해 9월 세계반도핑기구(WADA)의 금지약물로 지정된 멜도니움을 두고 공방이 이어지면서 러시아의 정치적 음모론까지 제기돼 파문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세계적 여자테니스 스타인 마리아 샤라포바가 금지약물 복용 사실을 고백해 충격을 안긴 것도 모자라 빙상스포츠의 최고를 자량하는 러시아 선수들이 잇달아 도핑혐의를 받고 있어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금지약물 러시아 선수들 무더기 적발…러시아 정부 관여 의혹 증폭
미녀 테니스 스타 샤라포바는 지난 8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1월 열린 호주 오픈에서 도핑테스트 결과 금지 약물 양성 반응이 나왔다”고 고백했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샤라포바는 지난 10년 동안 멜도니움을 복용했다며 부정맥과 당뇨병 치료를 위해 복용했다고 털어놨다. 특히 그는 “WADA에서 보낸 금지약물 목록 이메일을 확인하지 못했다”며 “내 실수”라고 자책했다.
그러나 금지약물 파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다. 샤라포바 충격이 가시기도 전 러시아 남자배구대표팀 소속으로 지난해 국제 배구연맹(FIVB) 주최 월드리그와 2016 리우올림픽 유럽지역 예선전서 뛰었던 알렉산더 마르킨이 금지약물 양성반응에 휩싸였다.
러시아 배구협회는 지난 9일 “마르킨이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약물 양성 반응이 나왔다”고 전했다. 월드리그에서 러시아대표팀을 이끌었던 알렉산더 클림킨 감독도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면서 “선수들 모두 약물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파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러시아 스피드 스케이팅 간판 파벨 쿨리즈니코프도 샤라포바와 마찬가지로 멜도니움 양성반응을 보인 것.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은 9일 “쿨리즈니코프가 최근 WADA의 도핑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또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세묜 예리스트라토프, 러시아 역도선수인 알렉세이 로프제프 등도 멜도니움 복용사실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러시아 당국이 국제경기 성적을 위해 선수들의 약물 복용을 묵인하고 장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어 향후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될 조심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지난 1월에는 러시아 사이클 선수 에두아르트 보르가노프가 멜도니움 양성반응을 보였고 지난 7일에는 러시아 피겨 아이스댄스 선수 예카테리나 보브로바도 복용사실이 드러나는 등 특정종목에 국한되지 않고 러시아 체육 곳곳에서 해당 약물 복용사실이 적발돼 국제적 위상이 크게 흔들리게 됐다.
군사용 멜도니움
증강제 의혹
특히 금지약물로 지정된 멜도니움에 대해 서방세계는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있다.
라트비아에서 개발된 멜도니움은 협심증과 심근경색 치료제로 동구권에서 의사의 처방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약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아프간에 투입된 소련군 사이에서 전투력 향상을 위해 주기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생산회사인 라트비아 그린덱스에 따르면 멜도니움은 심장약으로 혈류 개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유럽 의약창(EMA)에서는 금지돼 있는 약물이다.
이 약을 발명한 이바르스 칼빈스는 2009년 라트비아의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프간에 투입된 구 소련군에서는 정책적으로 한때 널리 사용되었다”고 밝혀 한때 본래 효과와는 다른 용도로 사용됐음을 털어놨다.
특히 구 소련은 아프간 고산지대에서 산소부족과 싸우며 무거운 장비를 지고 매일 20km씩 달려야 하는 군인의 혈액순환 보강제로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WADA는 멜도니움에 대해 본래 취지와 달리 운동선수들에게 빠른 회복과 운동능력을 향상시키는 목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이에 지난해 9월 금지약물로 지정해 올해부터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또 전문가들은 “멜도니움이 산소흡수량을 증대시켜 지구력을 늘려준다”면서도 “신체 일부의 혈액순환 부족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면 그린덱스 측은 “운동선수가 경기력 향상을 위해 지속적으로 이 약을 사용할 경우 기록 증진보다는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도니움이 금지약물로 지정되자마자 세계 정상급 러시아 선수들이 줄줄이 양성반응을 보이면서 세계 체육계는 이들의 성적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러시아, 서방 측 위상
흔들기 주장
이에 대해 러시아 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비탈리 무트코 러시아 체육부 장관은 한 러시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 상황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라며 “하지만 좀 더 많은 (약물 양성 반응) 사례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통령 공보비서(공보수석)는 러시아 선수들의 도핑 스캔들과 관련해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러시아 전체 스포츠계와 우리 선수들의 탁월한 공적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방식으로 이용해선 안된다”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는 또 “우리는 스포츠가 정치 밖에 머물러야 하고 스포츠를 정치화하고 스포츠에 어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파괴적이고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확신한다”며 서방이 도핑 스캔들을 러시아의 위상을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외무부는 WADA를 상대로 도핑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멜도니움을 금지약물 목록에 포함시킨 이유에 대해 해명을 요구한 상태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자국 TV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멜도니움을 금지약물로 등록한 WADA의 결정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며 “이에 대해 WADA가 전문가적이고 정직하게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단의 뛰어난 성적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배후에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어 후폭풍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관련자 급사…
도핑 폭로 차단 의혹
특히 이 같은 러시아 정부 배후설에는 최근 급사한 전 러시아 반도핑기구(RUSADA) 관계자가 러시아 체육계의 도핑 실태를 폭로하려 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더욱이 이번 갑작스런 죽음에 러시아 정부가 관여했다는 설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영국 선데이타이스의 데이비드 월시 스포츠 전문기자는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칼럼에서 지난 1월 14일 사망한 니키타 카마예프 전 RUSADA 집행이사가 지난해 12월 자서전을 공동집필 하자고 제안하는 이메일을 보내왔었다며 이 같이 밝혔다. 월시 기자는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의 도핑 의혹을 처음 제기해 유명세를 탄 인물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카마예프는 올해 52세로 2011년 3월부터 RUSADA를 이끌어오다 도핑 파문 직후인 지난해 12월 사임했다. 그는 도핑 파문 뒤 관련 분야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자 자서전을 통해 모든 걸 밝히리라 마음을 먹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월시는 컬럼을 통해 “카마예프가 스포츠약물연구소의 비밀 실험실에서 일한 28년 동안 알게 된 모든 것을 밝힐 생각이었다”며 “아직 공개되지 않은 문서와 기밀 정보, 국내외 기관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더욱이 월시는 “카마예프는 매우 활동적이고 건강했다. 스페인에 있는 별장에서 사이클도 했고 사망한 당일에도 크로스컨트리를 했을 정도였다”며 심근경색으로 알려진 사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정상급선수 퇴출로
올림픽 요동쳐
앞서 지난해 도핑 파문에 휩싸인 러시아 육상계는 당장 리우올림픽에서 퇴출됐고 도핑스캔들의 도화선을 당긴 샤라포바는 지난 12일부터 선수자격이 정지되며 최소 2년에서 최장 4년까지 경기에 나설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 도핑 사실이 밝혀진 이후 샤라포바의 스폰서였던 나이키는 후원 관계를 일시 유예했고 태그 호이어는 후원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기로 했다. 여기에 에비앙, 포르셰가 후원 중단을 선언하는 등 약 1억 파운드(약 1700억 원)를 날리게 됐다. 이와 더불어 샤라포바는 당장 올해 호주 오픈 8강에 올라서 받은 상금 37만5000 호주달러(약 3억3000만 원)도 반납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러시아 빙상계도 도핑파문으로 빨간불이 들어왔다. 쿨리즈니코프의 징계수준에 따라 평창올림픽 메달의 주인공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 쿨리즈니코프는 빙상계를 점령한 신성으로 불린다. 그는 2016 세계종목별선수권 500m와 1000m에서 1위를 휩쓸었으며 500m 세계신기록(33초98)을 세우는 등 정상을 차지한지 오래다.
지난달 태릉 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2016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 스프린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도 종합 우승을 차지해 평창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리스트로 점쳐졌다. 하지만 이번 파문으로 출전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이뿐만 아니라 종목별 단체들이 도핑 테스트에 더욱 엄중한 잣대를 내세울 것으로 보여 세계 스포츠계가 요동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유독 도핑 테스트에 너그러웠던 골프계가 이번 사태로 인해 긴장하고 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는 아직 금지약물로 지정되지 않은 멜도니움에 대해 오는 가을쯤 금지약물 리스트에 올리기로 했다. 다만 아직 소변검사에 머무르고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112년 만에 올림픽 무대로 돌아오는 골프의 경우 당장 오는 5월 6일부터 불시에 올림픽 수준의 도핑 테스트를 받게 되는 등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더타임스 등은 샤라포바 외에도 60명이 넘은 운동선수들이 도핑테스트에서 멜도니움 양성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해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데이비드 호먼 WADA 사무총창은 “멜도니움은 갑작스럽게 금지약물에 포함된 물질이 아니다. 지난 1년간 유예기간을 두면서 선수들에게 충분히 사용을 중단할 것을 권고했다”고 전한 바 있어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큰 파장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