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5- 안희제―家

2016-02-29     이범희 기자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그동안 ‘한국근대자본가연구(2002)’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 오미일은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하여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4년 3월 출간했던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는 그 결과물이다.

[일요서울]은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정착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그 여섯 번째는 ‘민족자본가의 전형 안희제’ 일가다. 민족자본가의 전형 ‘독립운동 도왔다’ 일반적으로 안희제는 무역상점 백신상회를 설립 경영해 상해 임시정부에 운동자금을 조달한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1910년대 중후반부터 1920년대 초 백산상회뿐만 아니라 주일상회주식회사의 주주였으며, 경남인쇄주식회사의 창립을 주도하고 조선주조주식회사의 설립 및 경영에 앞장섰던 부산 지역의 대표적 자본가이기도 했다.

또한 1929년 중외일보를 인수해 언론계에 8면지 발간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경영인이기도 하다. 안희제는 1885년 8월(음력) 경남 의령군 부림면 설뫼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강진인 안씨 집안은 고려 말 주자학을 전파한 안향의 후손이며, 임진왜란 때 곽재우와 함께 의령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했던 안가종은 안희제의 직계 선조다.

소지주 향반 가문에서 자라나 어린 시절 유학을 배웠으나, 1906년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상경해 민영환이 설립한 사립흥화학교에서 수학했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으나 설립자 이용익이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재정난이 심해진 데다 교장배척운동에 연루되어 양정의숙 경제과로 옮겨 1910년 1월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안희제는 신학문을 접하면서 당시 지식인과 지역 유지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던 계몽운동에 동참했다. 먼저 1906년 윤상은, 장우석 등과 함께 구포에 1년제 소학교인 구명학교를 설립했다. 구명학교는 교사 신축과 기타 준비로 1907년 9월에 개교했는데, 초대교장은 구포 객주 장우석이었다.

이 구명학교의 졸업생 가운데에는 후일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이 배출되기도 했다. 또 1907년 안희제는 완고한 집안 유림들을 설득해 문중 재산을 기반으로 고향 의령에 창남학교를 설립했으며 의령 대지주인 이우식의 자원으로 의신학교를 설립했다. 1908년에는 서울 거주하는 영남 지역 출신 지식인들이 조직한 교남교육회에 참여해 학교 설립을 지원하고, 시국강연을 통해 대중을 계몽하는 국권회복운동에 동참했다.

제조업 투자와 기타 경제활동 대개 안희제의 독립운동과 경제활동을 거론할 때에 그 중심되는 내용은 일반적으로 백산상회이다. 안희제가 한말 학교 설립을 비롯한 계몽운동부터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19210년대 기미육영회, 부산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도항저지철폐운동과 주택난구제운동, 협동조합운동, 중외일보 경영, 대종교 운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전개했음에도 유독 백산상회를 강조하는 것은 이 상점이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 창구로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백산상회는 안희제의 독입운동에서 핵심 내용으로 거론되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자료 부재 때문이다.

그러나 실증적 연구가 답보되는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소설·드라마 등을 통해 안희제와 그의 독립운동에 관한 신화화가 이루어지고 재생산되어왔다. 상해 임정에는 ‘임정36호’라는 첩보대가 존재했고 그 조장이 바로 안희제라는 이야기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안희제는 1910년대 중후반 무역업뿐만 아니라 공장공업체 설립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상인·지주자본의 제조업 투자가 전국적으로 증대하는 경제 상황에 부응해 제조업에도 투자를 확대했다. 그는 1916년 5월 자본금 5만 원으로 설립된 경남인쇄주식회사의 대주주였다. 백산상회와 백산무역회사가 개인 자격이 아닌 법인 자격으로 경남인쇄의 주주인 것은 주목할 점이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1919년 5월에 창립되었으므로 경남인쇄주식회사의 창립 주주가 아니라 창립후에 주식을 인수한 것이며, 백신상회는 1917년에 설립된 합자회사백산상회가 아니라 안희제가 개인경영한 백산상회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창립 초부터 주주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안희제는 개인상점 백산상회를 경영하는 동시에 경남인쇄주식회사의 창립에 주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주주인 전석준, 윤현태, 윤병준, 허발 등이 경남인쇄주식회사의 대주주인 점에서도 안희제와 경남인쇄주식회사의 연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경남인쇄주식회사는 부산의 인쇄공장 가운데 유일한 조선인 경영 공장이었다. 부산의 인쇄업이 일본인에게 장악된 상황에서 안희제가 일찌감치 경남인쇄주식회사의 설립을 주도했던 것은 단지 조선인 기업을 설립하겠다는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계몽운동 차원에서 인쇄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1921년 9월 운수노동자총파업 때 경남인쇄주식회사가 조선인 노동자들의 파업선언서를 인쇄해준 혐의 때문에 출판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던 상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파업 주동자들은 대개 부산청년회, 부산차가인조합에서 활동하던 이들로, 안희제와의 연계로 파업선언서를 인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업활동은 1910년대 중후반에 가장 활발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 기미육영회, 부산청년회 등의 사회·청년 단체를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회사 설립은 하지 못했고 기존의 회사 경영도 다른 임원진에게 위임했다.

결국 파산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주자본을 규합해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공칭자본금 100만 원의 무역회사를 창립하고 경영한 것은 그가 양정의숙 경제과 출신의 능력 있는 기업가임을 말해준다. 안희제가 백산상회를 설립한 것은 대동청년단이 독립운동자금의 조달과 연락망 구축을 위해 상점 경영을 운동 방략의 일환으로 실행했기 때문이었다.

 

◆ 알림  [연재]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은 1139호로 마무리합니다. 그간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