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③ 백남신·백인기 부자

관부물자 조달·수세 청부로 자본 축적한 노하우?

2016-02-04     이범희 기자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그동안 ‘한국근대자본가연구(2002)’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 오미일은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하여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4년 3월 출간했던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는 그 결과물이다. [일요서울]은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정착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그 세 번째는 ‘관부물자 조달과 수세 청부로 자본 축적한 백남신·백인기 부자’다.

백남신은 수원 백씨 문경공파 27대손으로 백진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족숙 현수에게 입후 됐다. 백남신의 본명은 낙신이며, ‘남신’은 고종이 하사한 이름이라고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

‘남신’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97년 그가 첫 공식 관직인 궁내부 주사에 부임하면서부터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고종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아야 하는데 고종과 연계를 맺을 수 있었던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궁내부에 어용 물품을 조달하면서부터일 것이므로 ‘남신’이라는 이름 하사는 사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다. 백남신에게 보형·보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보형의 자가 인기이며 호는 일정이다.

그는 1911년경 시사신보가 조사 발표한 50만 원 이상 조선인 자산가 32명 가운데 한 사람일 정도로 재력가였다. 지방 아전 출신인 그가 자신의 힘으로 당대에 대부호가 된 까닭에 당시 언론에서 ‘대위원’이라고 지칭할 정도였다.

그의 아들 백인기는 백남신이 아전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임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백남신이 1897년 이후 궁내부 주사, 내장원 검세관 등을 맡아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외획 활동을 하게 되자, 15·16세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시기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

그는 17, 18세부터 부친을 보좌해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했는데 그 능력이 경륜 있는 실업가를 능가할 정도였다. 메가타가 화폐재정정리사업 때 백인기를 ‘일유위의 청년으로 인정하고 먼저 호출’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의 사업은 서울 경제계에서 주목할 만한 규모였고 또한 그 결과도 성공적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첫 사업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미곡 무역을 위주로 해 각종 물화의 위탁매매와 전답·기타 상품을 담보로 한 금융 대부를 영업 내용으로 하는 객주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백인기는 1900년 이후 탁지부 주사·혜민원 참서관으로 두 차례 임용되었으나 모두 허직이었다. 이후 백남신의 관직 코스대로 육군 보병 장교직을 겸하고 있다가 1907년 7월 군대해산 때 정위로 해직됐다.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는 자강단체가 설립되고 있었는데, 백인기는 호남학회 설립에 참여해 재무부장과 경리부장으로 재정 지원을 담당했다.

자본 축척 경로

백남신은 원래 아전 출신이었다. 1897년 이후 전주진위대 향관으로서 군량 및 기타 군수물자 조달과 군인들의 월료 지급을 담당했다. 또한 궁내부 주사로 전라도 각 군에서 탁지부의 결제선을 지급받아 대궐의 소용 물자를 구입, 상납했다.

1902년 이후에는 내장원의 전라도 검세관으로서 탁지부에서 내장원에 외획한 결세전을 징수해 이를 지역 내에서 미곡·목면 등으로 무역해 서울로 운송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와 같이 관부물자 조달과 내장원의 외획을 담담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는데, 이를 주로 토지 매입과 사채업에 투자했다.

1904년 11월 외획이 폐지되고 1905년 12월 독쇄관에서 해임되자, 이후 백남신은 농장 형태의 농업 경영에 주력했다. 한편으로는 전주 지역 내 계절 간 가격 차익과 서울-전주 지역 간 가격차익을 겨냥한 미곡상도 겸했다.
백인기는 부친 백남신이 서울-전주를 오가며 외획 활동을 하던 때에 서울로 올라와, 17·18세 되던 무렵 객주 영업을 시작하면서 서울 상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백씨 부자는 메가타의 금융기관 재편에 적극 동승했으니, 백남신은 전주 지역의 어음조합, 농공은행 금융조합 동척에 참여했으며 배인기는 한성공동창고회사의 관명이사로 활동했다.
각종 금융기관에 참여한 관계로 한일은행을 비롯한 식산은행·동척 등으로부터 수십만  원에서 수백 만 원까지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자금으로 농장을 시축하고 국유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

백인기는 한일은행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의 대주주, 중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특히 기업 활동을 활발하게 한 시는 1905~1909년과 1920년대였다. 그 활동의 특징은 기업 설립을 주도해 경영자로서 분투하기보다 대표적인 일본인 기업 또는 조선인 대자본가 및 귀족들의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정체성은 지주적 기반에 기초하면서도 점차 자본 전환을 시도해 기업을 설립하고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 자본가라기보다 토지 매수와 농장 확장에 골몰한 지주에 가까웠다. 그는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차입에 의한 과도한 투자로 인해 1929년 어음을 부도내고 동경으로 피신하기도 했으나, 이후에도 토지 매입을 지속했다.

이러한 백씨 부자의 차본 축적 경로, 특히 백남신의 경우 대한제국 시기 관부물자 조달과 내장원 외획 과정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자본을 축적했다는 점에서 정상으로 뷴류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정상의 자본 축적 코스는 일본의 정상과는 달랐다. 일본의 정상은 메이지 정부가 1880년대에 민간에 헐가로 불하하 국영 기업을 기초로 산업자본으로 전환했고 이후 국가적인 산업 보호책에 의한 특혜 지원으로 각종 산업 분야로 확대, 재벌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세 청부·관부물자 조달로 자본을 축적한 조선의 정상은 식민지 경제체제로의 재편 과정에 동승 할 수는 있었으나, 종전의 배타적 특혜를 계속 누릴 수는 없었다.

이들의 자본 축적의 근간은 일반적으로 기업 이윤보다 미간지 불하에 의한 초과 이윤과 지대 수기에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이는 산미증식을 목표로 미간지 개척, 토지 및 농사 개량에 중점을 두었던 일제 산업정책에 적극 부응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상의 축적 자본이 산업자본으로 투자되지 못한 것은 그 기업가적 정신의 박약, 경영 방식의 저열 등 주체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산업정책과 제국주의 자본의 우위에 대해 누구보다 꿰뚫고 있는 정상이 권력을 배경으로 한 배타적 경제 권익에 익숙한 체질을 벗어던지고, 일본 대자본과 시장에서 경쟁하며 기업 이윤을 추구하는 ‘무모함’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선연계’라는 제국주의 산업정책에 동조해 제국주의 자본에 추수하는 손쉬운 길을 택했다. 대한제국에 의한 식산흥업 정책이 지속되었다면 일차적으로 그 수혜대상이 되었을 정상은 식민지화로 그 기회를 향유하지 못하고, 제국주의 자본의 성대한 잔치에 말석으로 초대받은 ‘혜택’에 기꺼워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