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입수] 대검 5년간 판결 분석 들여다보니…

“횡령·배임액 높을수록 무죄 확률 높다?”

2016-01-25     이범희 기자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이 있다. 돈이 있을 경우 무죄로 풀려나지만 돈이 없을 경우 유죄로 처벌받는다는 말이다.

법률소비자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0%가량이 이 말에 동의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검찰이 영남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제출받은 ‘2015년 대검찰청 정책연구보고서’에서도 이와 같은 답변이 나와 이목이 쏠린다.

향후 사법부가 이 보고서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내놓을지도 주목된다.

‘총수 선처’ ‘직원 엄벌’… 정상참작이 변수
“개선 필요하다” vs “총수 경영 위축 위려”


[일요서울]은 ‘횡령·배임 범죄에 관한 양형 기준의 적용 현황 및 개선방안 연구-고위지배주주를 중심으로’라는 제하의 용역 보고서를 입수했다.

216페이지 분량의 이 보고서는 대검찰청이 지난해 영남대에 의뢰한 것이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 동안 선고된 횡령·배임 범죄 6950건 중 유죄 판결을 받은 1994건을 분석한 결과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간 중 배임·횡령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지배주주, 대표이사 등 기업 최고위직의 72.6%가 집행유예를 받았다.

집행유예 비율은 임원 등 일반 고위직에선 67.8%, 중간직에선 62.6%로 내려갔다. 하위직은 52.0%로 최고위직과 20%포인트나 차이났다. 
보고서는 “최고위직의 경우 다른 직위에 비해 집행유예 비율이 현저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일반인들의 63.2%가 집행유예를, 36.8%가 실형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고 고위직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벌이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재미난 사실은 횡령·배임 액수가 높을수록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비율도 높았다는 점이다.
선고형량이 36개월 이하인 사건을 대상으로 같은 기간 횡령·배임죄 이득액 300억 원 이상의 죄를 저지른 피고인 11명은 전원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반면 이득액 1억원 미만의 피고인은 64%만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선고형량이 정해놓은 하한을 이탈하는 경우도 중간직-고위직-최고고위직 순으로 많았다. 최고고위직에 경우 전체 186건 중 부합건수 93.5%, 하한이탈 6.5%로 나타났으며, 고위직의 경우 508건 중 부합건수 88.8%, 하한이탈 7.1% 상한이탈 0.2%로 나타났다. 다만, 최고위직의 경우 실형을 받았을 때 다른 직위보다 형량이 무거운 편에 속했다.

보고서는 “고위 경영자 등의 배임 행위에 대해 엄벌을 요구하는 일반 국민의 법 감정에 부합하지 않는 데다 양형 기준의 기재 방식에 대한 규정도 없다”면서 “투명성과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판결문에 양형 이유를 적시하는 내규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법보다 돈?

보고서는 고위경영자의 횡령·배임죄에 대한 형사책임 강화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기업의 경영자가 선의로써 주의의무를 다하고 기업을 위한다는 판단으로 한 경영판단이 결과적으로 해당 기업에 손해를 끼쳤을 때 형법상 업무상 배임죄에 적용할지의 여부에 대해 형법학계에서는 크게 찬성하는 견해와 반대하는 견해로 나뉜다.

즉 한편에서는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경영자가 주어진 정보 안에서 회사를 위한다는 판단으로 내린 경영판단에 대해서 형법이 개입하는 것은 형법의 보충성원칙에 위배되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이라고 보아 업무상 배임죄의 적용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경영판단원칙은 미국 판례법상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면책하는 것이고, 고의책임이 아닌 주의의무의 위반여부인 과실의 문제라는 점에서 경영판단원칙 형법상 배임죄 적용을 배제하는 사유로는 부적절하다는 입장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국 판례법상 경영판단의 원칙이란 회사의 이사가 일련의 확인된 정보를 통해 선의로 결정된 사항들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으로부터 면책된다는 법원칙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과 같은 판례법 국가도 아니고 사회적·법적 환경이 다르다는 점에서 종래 경영판단원칙의 도입을 부정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것이 최근에 주주들을 중심으로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추궁 사례가 증가하고 있고 향후 경영책임을 묻기 위한 주주대표소송이 많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설명으로 2005년부터 2009년 횡령·배임 사건을 공시한 코스닥기업을 대상으로 회계부정 기업에 대한 투자자의 반응, 그리고 횡령·배임사건 기업의 이익조정과 기업지배구조와의 관련성을 분석한 연구를 밝혔다.

주로 횡령·배임사건 기업은 경영성과가 저조하고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인 것으로 나타났고, 횡령·배임금액은 자기자본 대비 평균 50.9%이며, 자기자본 대비 150%를 넘는 기업도 10개 이상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러한 경과가 비록 일부 기업에 대한 분석으로 일반화하는 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횡령·배임사건 기업들은 경제주체로서 유지되는 것보다는 부실기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 형사처벌의 강화로 기업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주장의 논거로 부적절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법원 관계자는 이에 대해 “최근에는 보고서와 달리 피의자가 얻는 이득이 커질수록 실형률이 높은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해명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총수 등 최고위직으로 갈수록 배임 혐의 판단에 있어 기업회생, 구조조정 목적 등 정상참작의 여지가 많다는 점도 감안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 또한 배임·횡령 피고인의 집행유예를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피해자와 합의했는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면 집행유예 비율이 97.4%, 피해액이 상당 부분 회복된 경우엔 97.1%에 달했다. 실제 재판에서는 오너 일가의 기업범죄를 회사 법인이 선처해달라고 법원에 탄원하는 사례도 있다.

최근 재벌 총수, 군 장성, 공공기관 대표 출신 등이 배임죄에 대해 잇따라 무죄 선고를 받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