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 폭력의 현주소…국가대표 선수들의 슬픈 금메달
코치의 폭행에 시달리다 올림픽 꿈 접은 유망주도 있어
2016-01-11 장휘경 기자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역도 금메달리스트인 사재혁(31)이 열 살 아래의 후배 황우만(20) 선수를 때려 왼쪽 눈 밑 뼈를 함몰시키는 등 전치 6주의 상해를 입혀 스포츠를 사랑하는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지난 4일 대한역도연맹이 자격정지 10년의 중징계를 내림으로써 사재혁은 사실상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됐지만 10년 뒤에는 다시 지도자로서 활동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많다. 행위에 비해 처벌이 너무 가볍다는 주장이다.
사재혁은 지난 12월 31일 오후 11시께 강원도 춘천시의 한 술집에서 후배 4명 등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황우만을 불렀다. 그리고는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너는 모르고 있다. 기분 나쁘다”며 30여분간 주먹과 발로 폭행했다. 사재혁은 중간에서 만류하던 후배 선수에게도 얼굴에 타격을 가하는 등 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재혁은 앞서 지난해 2월 태릉선수촌에서 “태도가 불량하다”며 황 선수를 때린 적이 있다. 황우만은 당시 자신이 맞은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았는데, 사재혁이 이를 알고 이날 자신을 다시 폭행했다고 주장했다.
사재혁은 “태릉선수촌 구타 사건과 관련한 오해를 풀고자 황우만을 불렀으나 얘기 도중 감정이 격해져 우발적으로 폭행했다”고 경찰조사에서 진술했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인 1월 1일, 사재혁은 춘천의 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는 황우만을 찾아가 사과했다.
황우만은 “선배에 대해서는 늘 감사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운동해왔다”며 “하지만 성격상 고마움에 대한 표시를 못 했을 뿐인데 이런 일을 당해 너무 충격을 받아 운동을 계속할지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재혁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경기 도중 팔꿈치 관절이 빠졌는데도 바벨을 놓지 않는 투혼을 보였고, 일곱 차례나 수술을 받고도 선수 생활을 포기하지 않아 ‘오뚝이’로 불린다. 황우만은 2014년 세계청소년역도선수권대회 최중량급(105㎏ 이상)에서 합계 2위에 오른 유망주로, 침체기에 접어든 한국 역도계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선수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한국 역도는 국민의 싸늘한 눈길에 부딪히게 됐고, 8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대표팀 구성 및 훈련 일정도 차질을 빚게 됐다.
체육계 폭력은 고질병?
사재혁의 후배 폭행 사건을 계기로 체육계에서는 폭력 문화 근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감독과 코치, 또는 선배 선수에 의한 폭력 사건은 왕왕 일어나는 체육계의 고질병으로서 경기 도중에도 폭행이 이뤄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로 인해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고 대회 출전의 꿈을 접거나 선수 생활을 포기하는 선수도 있었다.
2014년 대한체육회는 승부조작 및 편파판정, 입시비리, 조직사유화와 함께 폭력을 ‘체육계 4대악’으로 지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체육계에 폭력이 난무하는 이유는 성적지상주의에 빠진 결과 강압ㆍ수직적 위계문화가 만연한 때문이기도 하다. 무조건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며 선수를 가혹한 훈련과 지나친 경쟁으로 내모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그 과정에서 폭력이 용인되거나 묵인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지도자와 선수들 사이에서 맞고 나면 경기력이 좋아진다고 여기는 전근대적 의식이 여전히 되풀이되는 것도 폭력을 근절하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다.
대한역도연맹 이형근 선수위원회 위원장은 “이제는 더 이상 폭행이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 폭행을 행사하는 선수는 역도계에서 존재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며 “사재혁 선수는 이번 사건은 무조건 자신의 잘못으로 발생한 것이기에 어떤 징계가 내려지든 달게 받겠다고 말하고 황우만 선수가 입원한 병원에 매일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들은 이번 사건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는 “적잖은 분노를 느낀다”며 “체육계에서 더 이상 폭력이 묵인돼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하지만 현재 선후배 간 또는 코치-선수 간 폭력은 학교에서부터 국가대표팀까지 체육계 전반에 퍼져 있어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최근 인터넷을 통해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일부 체육대학교 학생들의 카카오톡 단체방 대화 사진을 보면 ‘군기잡기’가 군대 못지않음을 알 수 있다.
공개된 대화방 사진을 보면 대화 때 ‘다’나 ‘까’로 끝나고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지시사항이 담겨 있다.
폭력에 대한 처벌 너무 가벼워
과실 소파나 의자에 앉지 못하게 하고 선배들이 부르거나 시키면 뛰어다녀야만 한다는 등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세부적인 행동지침 등도 숨통을 조였다.
이처럼 교육 현장에서 이뤄졌던 ‘군기잡기’는 고스란히 국가대표팀까지 이어지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해 9월에도 태릉국제빙상장에서 열린 훈련 도중 고참급 선수가 막내 선수에게 달려들어 욕설과 주먹을 휘두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훈련 중 선두에서 레이스를 이끌던 선배 선수가 삐끗하자 그 틈새로 후배 선수가 추월했고 선배 선수가 이에 걸려 넘어지자 발끈해서 폭행한 것이다.
후배 선수를 폭행한 선배 선수는 쇼트트랙 에이스 신다운(서울시청)이었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은 2015-2016시즌 대회 출전 정지 징계를 내렸지만 올해 상반기부터 시작되는 대표 선발 경기부터 바로 복귀가 가능해 체육계 폭력에 대한 처벌이 너무 경미하다는 비난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루지 대표팀에서도 권모 선수가 코치 이모씨의 폭행과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결국 소치 올림픽 출전 꿈을 접은 사연이 알려졌다.
러시아 소치 겨울올림픽을 준비하던 권 씨는 2012년 11월 소치 경기장 인근 숙소에서 코치 이 씨로부터 짐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루지 썰매 날로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을 여러 차례 얻어맞았다.
권 씨는 2013년 8월 평창 루지 경기연습장에서 훈련하다 늦게 귀가했다는 이유로 이 씨로부터 쇠파이프로 엉덩이를 맞았다.
같은 해 9월에도 이 씨는 권 선수가 동료들과 PC방에 갔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뺨을 때리고 부상 부위인 머리를 승합차에 대고 짓눌러 뇌진탕 진단까지 받게 했다. 코치는 권 선수가 숙소를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도 권 씨의 뺨을 때리고 코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서울동부지법 제14민사합의부(부장판사 박창렬)는 전 루지 국가대표 선수인 권모씨가 코치인 이모씨와 대한루지경기연맹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900여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대한루지연맹이 권 씨에게 내린 국가대표 선수 자격정지 2개월의 징계도 무효로 판결했다.
이밖에도 2009년 남자 배구 국가대표팀에서 당시 이상열 코치가 박철우 선수를 구타해 무기한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고, 2004년엔 여자 쇼트트랙 선수들이 코치의 잦은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다가 선수촌을 집단으로 이탈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선수의 부모가 응원 차 지켜보는 경기에서도 코치가 선수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가하는 경우가 있으나 폭행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처벌로 그치는 사례가 많다.
무엇보다 선수와 지도자가 ‘체벌이 경기력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그릇된 생각을 공공연히 표출해 폭력에 쉽게 노출되게 하고 있다. 체육계 특유의 폐쇄적인 집단문화가 폭력을 조장하고 있기도 하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지난 3~4년 동안 비슷한 사건을 겪으면서 연맹과 협회가 제도적인 개선 등 많은 노력을 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상명하복, 일사불란 등 ‘조폭 식’ 생활문화에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는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폭행 사건은 지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