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가도 우회로 급선회한 김무성
청와대에 전략공천 양보하나
박 대통령-시진핑 만나기 전 한중 FTA 숙제 완벽 처리
청와대에 전략공천 양보 가능성… 수도권은 상향식 공천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믿고 가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11월 29일 유엔 기후변화협약 총회 참석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출국하면서 배웅나온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에게 한중 FTA(자유무역협정) 비준안 국회 처리를 당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 대표는 즉각 행동에 돌입했다. 파리 총회에서 박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조우할 예정인 만큼 그 전에 비준안을 통과시켜야 ‘체면’을 세워줄 수 있었다. 김 대표는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에게 다음날 오전 여야 수석부대표회동에서 한중 FTA 처리와 관련해 ‘오전 10시 여·야·정 협의체, 11시 각 당 의원총회와 외교통일위 전체회의, 오후 2시 본회의’를 관철시키라고 지시했다.
결국 오후 5시5분에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중 FTA 비준안이 첫 번째 안건으로 상정돼 표결처리됐다. 박 대통령은 2시간여가 지난 오후 7시30분(한국시간) 총회에 참석한 각국 정상과 기념 촬영을 하고 시 주석과도 잠시 환담을 나눴다. 우리나라 국회에서 한중 FTA 비준안이 통과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음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김 대표가 본회의장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서울과 파리의 시간을 비교 검색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믿고 간다’는 박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을 만나기 전까지 본회의 절차를 끝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의 ‘순방 숙제’를 말끔히 해결한 김 대표는 본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께서 파리에 계시고, 시진핑 주석도 만나게 되는데 그 전에 비준된 것에 대해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자탕집 새벽 ‘소맥 회동’
그로부터 사흘 후인 3일 새벽 2시. 우여곡절 끝에 새해 예산안을 처리하고 본회의장을 나오던 김 대표에게 친박계인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가 “대표님 소주 한잔 사주세요”라고 했다. 김 대표는 “그러자”고 했고, 마침 곁으로 지나가던 김재원 의원 등을 향해 “감자탕집으로 온나”라고 했다. 김 의원은 대통령 정무특보를 지낸 친박계 핵심이다.
그렇게 해서 친박계를 포함한 10여명의 의원들이 국회 인근의 감자탕집에서 ‘새벽 소맥(소주+맥주 폭탄주) 회동’을 가졌다. 친박계 의원들이 여러 명 참석했고, 김희정 여성부 장관도 자리를 같이 했다.
이 두 장면은 차기 대권가도를 달리고 있는 김 대표가 ‘박심’(朴心·박 대통령 생각)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읽게 한다. 또 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친박계 의원들도 포용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김 대표는 박 대통령과 구원(舊怨)이 깊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가에서 “저는 YS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했다. 이 말은 친박계에 공격거리가 됐다. 친박계 한 의원은 “결국 자신의 정치적 뿌리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항거했던 상도동계임을 커밍아웃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친박계 홍문종 의원이 제기한 ‘반기문 대통령-친박계 총리’ 조합을 전제로 한 이원집정부제 개헌론도 김 대표를 압박하고 있다. 김무성 대항마로 내세울 마땅한 차기주자가 없는 친박계에서 김 대표의 독주를 막기 위해 아예 분권형 개헌을 추진하는 극단적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이나 친박계와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대통령 프렌들리’ 전략을 대권가도의 첫 번째 전략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김 대표의 핵심 측근은 “박근혜 정부의 성공이 김무성 대망론의 전제조건”이라며 “박 대통령도 지금은 친박계의 이런 저런 김무성 폄하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대표는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사퇴까지 불러온 공무원연금개혁법 처리과정에서도 총대를 맨 바 있다. 한중 FTA 비준안과 새해 예산안을 처리한 뒤에는 박 대통령의 중점 국정과제인 노동개혁을 포함한 4대개혁에 올인하고 있다.
최근 불거진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때도 앞장서 박 대통령의 입장을 대변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회동했을 때 역사 교과서 문제로 박 대통령을 공격하자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립서비스도 점차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공개석상에서 인사말을 할 때마다 ‘박비어천가’(朴飛御天歌)를 부른다. 박 대통령을 레임덕 없는 개혁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며 호위무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이렇게 개혁적인 대통령은 앞으로 만나기 힘들 것”이라며 박 대통령의 개혁의지를 호평했다. 또 포항 당원교육 행사에 참석해선 “제가 우리 대통령의 개혁 길에 항상 선두에서 임기가 끝나는 그날까지 레임덕 없는 훌륭한 ‘개혁 대통령’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레임덕 없는 대통령 만들기
‘부산일보’ 인터뷰에선 “내년은 박 대통령의 집권 4년차로, 정책의 성과들이 열매를 맺는 가장 중요한 시기다. 새누리당이 반드시 총선에서 승리해 안정적인 의석수를 확보해야만 필수적인 국정과제들을 끝까지 잘 마무리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대표가 박 대통령에게 줄 ‘큰 선물’은 따로 있다. 바로 TK(대구·경북)지역의 공천권 양보다. 김 대표는 여전히 “내가 있는 한 경선 없는 전략공천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반면,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윤상현 의원 등은 끊임없이 ‘TK 물갈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유승민 파동’을 거치면서 박 대통령이 대구·경북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음이 확인된 까닭이다. 이미 여러 명의 청와대 전직 참모들이 대구로 내려가 표밭을 갈고 있다.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을 비롯해 추가로 차출될 ‘대통령의 사람들’도 줄을 서 있다.
그러나 김 대표가 주장하는 경선을 통한 상향식 공천으로는 TK 물갈이에 한계가 있다. 특정인물을 특정 선거구에 내리꽂는 전략공천 방식이 절대 필요하다. 현재 새누리당 당헌·당규엔 전략공천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우선추천지역’ 조항이 있다. 여성이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나 공천신청자의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질 때 경선 없이 추천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김 대표는 아직까진 “우선추천지역은 전략공천과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TK 물갈이를 위해 우선추천지역의 해석을 달리해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요구할 경우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김 대표의 측근은 “아마도 청와대가 절대 우세지역인 TK와 서울 강남지역 공천권은 자신들에게 넘겨주고 수도권을 비롯한 다른 곳은 무대(무성이 대장·김 대표 별명)가 알아서 하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김 대표 입장에선 모든 것을 다 가지려다가 그나마 있는 것도 날릴 수 있는 상황이니 청와대나 친박계와의 주고받기가 현실적일 수 있다. 이 경우 ‘박심’을 얻어 친박계 강경파의 견제를 극복하는 길도 열린다.
이런 유연한 모습은 과거엔 상상하기 어려웠다. 지난해 7·14 전당대회 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을 때 “앞으로 청와대에도 할 말은 하는 대표가 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또 내년 4·13 총선 공천룰을 놓고 당·청이 충돌했을 때는 의원총회에서 “청와대가 당 대표를 모욕했다. 오늘까지만 참겠다”고 경고를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40% 콘크리트 지지층’이 여전한 것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자, 장기적으로 이를 끌어안기 위해 ‘대통령 프렌들리’로 급격히 선회하고 있다. 이 경우 친박계 강경파의 거센 압박도 박 대통령이 막아줄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김 대표도 모종의 칼을 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정현 최고위원과 윤상현 의원 등 친박계 핵심의 ‘김무성 불가론’마저 뛰어넘어야 하는 까닭이다. 김 대표는 최근 측근들이 ‘왜 그렇게 저자세로 가느냐’고 물으면 “99번 울어도 100번째만 웃으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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