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한류’ 계은숙의 인생역정

일본서 최고의 톱스타였으나 결혼 후 몰락…상습마약·사기혐의 징역 1년6월

2015-11-30     장휘경 기자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1985오사카의 황혼으로 일본 가요 무대에 진출한 뒤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던 가수 계은숙(53)이 상습 마약 투약과 사기 혐의로 16개월의 징역형과 80만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형사2단독 이상훈 판사)은 필로폰(메트암페타민) 투약과 포르셰 자동차 리스 및 주택 임대차 관련 등 두 건의 사기 혐의로 기소된 계은숙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이같이 판결했다. 

계은숙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200711월 각성제(마약류)를 소지한 혐의로 현지 단속반에 체포돼 일본 도쿄지방법원에서 징역 1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한국에 온 뒤 201210월부터 최근까지 자신의 집과 호텔 등지에서 여러 차례 필로폰을 소지 및 투약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계은숙은 또 지난해 2월 국내에서 가수 활동을 재개한 뒤 같은 해 7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다가구주택 세입자와 전세계약을 체결하면서 선순위 보증금 액수를 속여 피해를 끼친 혐의(사기)로 기소됐다. 이와 함께 비슷한 시기에 고가의 외제차를 리스해 대금을 내지 않은 채 돈을 빌리기 위해 차를 담보로 제공한 혐의(사기)로 불구속 기소됐다.
 
법정에서 형을 선고받던 날, TV아시히와 니혼TV, 후지TV 등 일본 방송사 기자들이 방청석에 앉아 계은숙에 대한 판결문을 받아 적는 등 많은 관심을 보였다.
 
불운 잇따라
 
허스키한 음색이 매력인 미모의 가수 계은숙의 생애는 소설보다 더 기구하고 희비가 엇갈리는 굴곡의 사연들로 가득하다.
 
19627월 충남 서산 외갓집에서 아버지 없이 태어난 그의 삶은 가난하고 외로웠다. 언니와 단 둘이 자랐던 그는 어머니가 생업을 위해 고달프게 사는 가정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평탄치 않은 생활을 이어갔다.
 
어머니가 명동 증권가에서 작은 매점을 운영하며 살 때 열두 살 계은숙은 우산이나 신문을 들고 행상을 하며 어머니를 돕던 시절도 있었다.
 
남자가 없는 집안에서 남자처럼 씩씩하게 성장했지만 매우 여성스럽고 얼굴이 예쁜 그는 1977럭키샴푸광고모델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1979년 첫 히트곡 노래하며 춤추며로 인기가수의 꿈을 이룬 그는 가수왕보다는 돈을 잘 버는 가수가 되고 싶어했다. 양로원을 지어서 외로운 할머니를 돌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전 총리가 팬클럽 회원이었을 정도로 대중적 사랑을 듬뿍 받았던 계은숙은 소망대로 재산을 모을 기회가 많았으나 불운한 일과 인간관계로 실속을 잃는 일들이 잦았다.
 
가요활동이 부진할 때는 강남에서 유흥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활동무대를 일본으로 옮겼을 때 엔카여왕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인기와 돈을 한꺼번에 거머쥐기도 했지만 부자가 됐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1999년에는 한국인 남편과 이혼했고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거액의 세금을 추징당하는 시련도 있었다.
 
과거 국내에서 한창 인기를 누릴 때, 승용차가 전복되는 대형교통사고로 머리에 유리 파편이 박혀 대수술을 통해 제거하기도 했다.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질병인 두통증세가 생겼다. 수시로 머리가 아플 때마다 주변사람들이 갖다주는 약을 복용하다가 각성제 중독이 됐다고 한다.
 
원조 한류명성 드높아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주름잡으며 톱스타로서 활동했던 원조 한류가수 계은숙. 비록 금지된 약물복용으로 20여 년간 쌓아올린 인기와 명예를 잃고 돌아왔지만 지난해 32년 만에 다시 국내 활동에 나서며 재기의 꿈을 이루는 듯했다.
 
그는 당뇨와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인 고령의 어머니에게 한국에서 다시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굳은 의지를 보였었다.
 
당시 그는 신곡 3곡과 기다리는 여심’, ‘노래하며 춤추며’, ‘나에겐 당신밖에등 과거 히트곡 3곡까지 총 6곡이 수록된 음반을 준비 중이었다. 국내에서 일본 팬들을 위한 디너쇼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더 인기가 높은 그는 현지에서 가장 막강한 가요 프로그램인 NHK '홍백가합전1989년부터 1994년까지 무려 7차례나 출연했을 정도로 최정상급 스타였다.
 
계은숙은 일본에서 성공을 거둔 후 1992년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조용기 목사의 주례 하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NHK 등 일본 취재진 40여명이 몰려 장사진을 이뤘다.
 
하지만 불과 6년 만에 결혼생활은 파국에 이르렀고 이후 계은숙은 우울증을 동반한 슬럼프에 빠졌다.
 
그는 전 남편에 대해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이었는데 공연차 찾은 일본 공항에서 만났다. 안면 있는 동네오빠였다남편이 장남인데 내가 아이를 갖지 못했다. 집안일과 가수 일을 병행하며 스트레스를 느꼈고 남편은 사업이 잘 안 됐다. 결국 서로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기 위해 헤어졌다고 고백했다.
 
지난해 8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5촌 조카로 알려진 김모(53)씨와 스포츠카 포르셰 리스 사기에 함께 연루돼 내연관계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김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상희 씨의 차녀 계옥 씨의 장남으로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처조카이기도 하다.
 
한편, 계은숙은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활동한 이유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못한 고통에 일본으로 도피했다고 말했다.
 
계은숙은 당시 사랑하는 사람의 집안이 가수 며느리보다 평범한 며느리를 선호했다. 결국 결혼 3일 전 남자가 가족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돌연 사라졌다면서 그러나 배신당한 기분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계은숙은 이 일로 인해 방송 당일 패닉 상태에 빠져 방송 펑크를 냈다가 출연정지를 당했다. 그는 가수로서도 여자로서도 살 수 없을 것 같던 현실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과 상황의 괴리감에 괴로웠다. 가수 이전에 한 여자로서 느낀 비참함도 있었다. 결국 도피와도 같이 일본에 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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