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 페루발 금융개혁 발언 후폭풍
“4시에 문 닫는 은행 없다”… 은행권·국민들 반응 온도차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오후 4시면 문 닫는 금융사가 (한국 외에) 어디에 있느냐”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발언과 관련해 금융권이 술렁이고 있다.
이 소식을 접한 은행원들은 “4시에 문 닫고 퇴근하는 줄 아느냐”며 불만을 토로한다. 반면 일반인은 최 부총리의 발언을 지지하며 “4시 이후 은행을 이용할 수 없고, ATM기 사용의 한계를 느낀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현직 금융 수장이 ‘오후 4시’로 정해진 은행 폐점 시간을 “늘릴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하나·KB 등 “폐점 시간 늘릴 수 있다”…향후 어떤 결론 낼까
최 부총리 정치적 노림수?…금융 노조 “발언 책임 꼭 묻겠다”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페루 리마를 방문했던 최경환 부총리는 지난 11일(한국시간) “오후 4시면 문 닫는 금융사가 (한국 외에) 어디에 있느냐”면서 “입사 10년 후에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도 일 안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한국 금융이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라고 일침을 날렸다.
높은 연봉으로 ‘신의 직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은행권을 비롯한 금융권의 개혁을 시사하기 위해 든 예지만 이 발언에 대해 은행원들은 실정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며 강한 불만을 털어놓고 있다.
여기에 현직 금융권 수장도 ‘오후 4시’로 정해진 은행 폐점 시간을 “늘릴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재차 논란이 되고 있다.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13일 “고객이 원한다면 은행 영업점이 오후 4시 이후에도 문을 열 수 있다”고 전했다.
김 회장은 이날 오전 서울 명동 KEB하나은행 본점에서 열린 ‘하나멤버스’ 론칭행사 후 기자들과 만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변형시간 근로제를 공단과 상가 등 일부 필요 지역에 확대하는 것을 검토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15일에는 국민은행이 은행 지점 영업시간의 다변화를 확대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며 최 부총리의 발언에 호응했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현재 일부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는 특화점포의 전국 확대 시행을 검토하고 있다. 지점망을 재편 중인 국민은행이 영업시간 다변화를 전국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현재 국민은행은 지역 특색에 맞게 다양한 특화 점포를 운영 중이다. ‘평일 오전 9시~오후 4시’라는 영업시간을 벗어나 오후 늦게까지 여는 점포, 주말에도 여는 점포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 점포들을 늘려 ‘영업시간 파괴’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늘려라 vs 힘들다. 결론은
이같은 발언들이 이어지자 일부 은행원들은 난색을 표한다.
A은행 한 관계자는 “영업점 종료 후 잔업을 해야 하는 업무 프로세스가 혁신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어려운 상황”이라며 “6시까지 연장근무를 한다면 밤 11~12시 퇴근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B은행 영업점의 직원은 “셔터 문을 닫고 전산망에 입력한 금액과 실제 남은 현금을 맞춰보는 ‘시재마감’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시재는 남아도 모자라도 골치다. 남는 금액은 주인을 찾아줘야 하고 모자라면 자신이 채워 넣어야 한다. 따라서 고도의 집중을 해야하고 업무가 끝난 후에는 피로감이 몰려온다”고 토로했다.
이는 은행창구 업무는 오후 4시에 끝나지만 영업종료 이후 내부에서 이뤄지는 업무가 많아 실제 은행 직원들의 퇴근 시각은 오후 7~8시정도라는 게 금융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최 부총리의 발언은 ‘억대연봉 은행직원들 오후 4시에 퇴근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노조를 비롯한 금융권에선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은 성명을 통해 최 부총리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노조는 “최 부총리가 한국 금융부문의 경쟁력이 낮은 책임을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 전가한 무책임한 발언”이라며 “금융개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최 부총리가 무능력과 책임전가에 골몰하지 않고 스스로 사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우리나라 금융기관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노동시간은 법정 노동시간인 8시간보다 2~5시간 가까이 길다”며 “이러한 현실에서 은행권에서 오후 4시에 영업종료를 한다고 금융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코미디”라고 지적했다.
반면 일반업에 종사하는 직장인과 소상인들은 최 부총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D직장인은 “업무 시간에 잠시 시간을 내는 것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 눈치를 보지 않으면 업무 자체를 보기가 힘들어 눈치 보면서 은행을 찾는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일반인은 “4시 정각에 셔터가 내려간 은행을 보면서 한숨 짓고 뒤돌아 간 적이 있다”며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은행원들이 이 시간 이후 잔업을 한다고 하는데 전체는 아니더라도 일부 창고라도 운영을 해주면 안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과거 논의된 바 있는 ‘탄력적 영업’을 빗댄 것이다.
실제로도 금융권 일각에선 최 부총리에 이어 금융 수장들의 발언이 공개석상에서 밝혀지면서 효율적으로 점포를 운영해 고객이 많은 지점을 위주로 탄력적인 영업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수익이 나지 않는 점포를 통폐합하고 이곳의 인력을 주요 점포에 투입해 영업시간을 오후 6시까지 늘리자는 것이다.
시중은행의 한 부행장은 “인터넷·모바일 뱅킹이 발달하면서 지점의 수익이 줄어들고 있지만 고객의 불편을 고려해 적극적으로 점포를 줄이지는 못하고 있다”며 “고객이 몰리는 지점에 인력을 보충하고 영업시간을 확대하는 방향이 효율적이지만 결제·송금 시간대 등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다”고 전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김 회장의 발언과 관련 “하나은행은 일요일이나 4시 이후에도 근무하고 있는 영업점이 있다”며 “(김정태 회장의 뜻은) 당장 근로시간을 늘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변형근로제를 감안해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임금피크제 도입, 연봉제 확산을 앞두고 노조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계산된 발언이라는 분석도 있다.
최 부총리가 노련한 정치인답게 금융개혁의 우선 과제인 ‘관치금융 근절’은 피해가고 대신 연봉제-노동시간-노조 문제를 꺼내서 여론몰이에 나선 것이란 해석이다. 이에 따라 당분간 은행 업무 시간에 대한 논쟁은 더욱 가열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