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 된 김만복 전 국정원장
‘정보장사꾼’ 같은 사람이 국정원장이었던 대한민국
[일요서울 | 송승환 기자] 최근 ‘남북 정상 간 핫라인’ 발언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김만복(69)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국민적 비판과 통렬한 질타가 이어지고 있다. 김 전 원장은 국정원에 의해 국정원직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됐다. 그는 최근 언론 인터뷰와 회고록 출간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핫라인(직통전화)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이후 파문이 일자 “두 정상이 직접 통화한 적은 없다”고 말을 바꿨다. 한마디로 ‘황당한 코미디’다. 이런 인물이 국가 정보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국정원의 수치이고 국가적 망신이다. 주요 언론들은 기획기사와 해설기사, 사설과 칼럼을 통해 “경박한 처신”이니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니 “국가 기밀누설”이니 “정보장사꾼”이니 하면서 김 전 원장을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야당에서는 김 전 원장의 처신에 문제가 있다며 ‘일벌백계(一罰百戒)’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경박한 처신에 국민 공분…검찰 고발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지난 2일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이 있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직접 통화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밝혔다. 김 전 원장은 이날 노무현재단이 주최한 ‘10·4 남북정상선언 8주년 국제심포지엄’에서 노 전 대통령과 김 전 위원장이 전화통화를 했느냐는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질문에 이같이 답변했다.
심포지엄에 함께 참석한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도 “내가 안보실장을 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 간 전화나 대화에 모두 배석했는데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전화한 적도 없고 배석한 적도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노무현·김정일 수시로 직접 통화했다”는 한 일간지 보도와 관련, “두 정상 간 의사가 쉽게 즉각적으로 교환될 수 있는 라인이 있었다는 의미로 설명했는데, (직접 통화한 것처럼)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지난 8일 국정원이 법원에 판매금지를 신청한 자신의 회고록에 관해 “대부분 책이나 언론 등을 통해 공개된 것이라 비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50부(김용대 수석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출판물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 사건 첫 심문기일에 출석해 회고록 내용이 국정원 비밀이나 직무와 관련이 없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임기 말인 2008년에 써서 공개하려고 했는데, 방북대화록 유출 관련해 수사를 받게 돼 연기했다. 이후 남재준 전 국정원장이 정상회담 대화록의 1급 비밀을 ‘일반’으로 분류, 공개해서 아무나 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공저자인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정책실장과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현 경기도교육감)은 국정원 근무 경험이 없어서 국정원 허락을 안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오는 16일 심문기일을 한 차례 더 열어 양쪽 주장을 다시 듣고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일지 판단한다.
한편, 검찰은 김 전 원장을 국정원이 고발한 사건에 대해 지난 7일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지난 6일 오후 국정원이 김 전 원장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함에 따라 사건을 공안1부(백재명 부장검사)에 배당했다. 검찰은 문제의 발언과 회고록 내용이 공무상 비밀에 해당하는지 면밀히 검토하고 김 전 원장을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김주필 공안1부 부부장검사가 주임 검사로 지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지원, “국정원장 출신다운 이야기하라” 경고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지난 5일 논란이 된 김 전 원장에 대해 “(국정원장) 재임 때 이명박 당선인을 찾아가 한 언행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이날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 “김 전 원장이 퇴임 후 일본의 모 월간지 인터뷰에서 국정원 정보를 유출해 기소당한 경험이 있으면 말을 조심해야 한다. 국정원장 출신다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며 이같이 경고했다.
또한 “김대중 정부에 대해 6·15 남북회담이 어쩌니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핫라인을 했느니 등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할 경우 제가 아는 김 전 원장의 문제에 대해 공개하겠다고 했더니 본인에게서 연락이 왔다”면서 “제가 전화를 못 받아서 문자로 해명이 왔다. 제 보좌관에게도 연락이 와서 이제 좀 조용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밝혔다.
김 전 원장이 내년 총선 부산 기장군 출마를 염두에 두고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의혹제기에 대해서는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한국인 납치사건 당시에도 지나치게 노출해 총선 출마를 위해 그런다고 말썽이 됐다”며 “야당이지만 우리도 말하지 않고 있다. 원장을 지낸 분은 더 조심해야 한다”고 따끔한 일침을 가해 주목을 받았다.
檢에 세 번째 찔리는
‘가벼운 언행’
이같은 김 전 원장의 경박한 처신은 국정원장 재임때부터 끊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1부는 2009년 1월 5일 방북 대화록을 유출한 김 전 원장에 대해 ‘입건유예’ 처분을 내리고 내사를 종결했다. ‘입건유예’는 불법성 문제는 있지만 범죄의 정황 등을 참작할 때 형사사건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사건의 시작은 2007년 12월 1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7대 대통령선거 투표일 하루 전날인 이날 노무현 정부의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은 국정원 대북파트 간부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방북, 북한의 정보책임자인 김양건 통일선전부장과 만났다. 김 전 원장의 방북 사실은 보름 뒤인 2008년 1월 3일 알려졌다.
이른바 ‘대선용 북풍(北風) 기획’ 의혹이 거세게 일었다. 대선 승리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이명박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국정원에 ‘김만복 원장과 김양건 부장의 대화록’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1월 8일 국정원은 인수위에 대화록을 전달했다. 그런데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은 인수위에 보고한 이 비밀자료를 1월 9일 A일간지 기자에게 넘겼다. A언론사는 자료의 전문을 대서특필했다.
인수위 측은 국정원 측이 주도한 ‘언론 플레이’로 판단했다. 문건에는 김만복 원장에게 유리한 내용만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원 측은 한동안 언론에 “인수위 내부에서 유출됐을 것”이라고 발뺌했다.
1월 15일 김만복 원장은 문건 유출자가 본인임을 시인한 뒤 사의를 표명했다. 검찰은 1월 21일 김 원장에 대해 공무상 비밀 누설(형법 127조 위반) 혐의로 내사에 착수했다.
현직 국정원장에 대한 국가기밀자료 유출 사실이 밝혀진 직후 이명박 정부는 “국기(國紀)를 심대하게 문란케 한 사건” “엄중 처벌해야”라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검찰도 김 원장에 대해 구속 등 사법처리 가능성을 시사했다. 당시 야당과 언론도 김 원장 성토 일색이었다.
검찰 측 내사결과에 따르면 김 전 원장이 국가기밀을 유출한 점은 사실로 인정됐다. 유출 동기는 “의혹이 증폭되자 이를 해명하는 차원”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유출 동기’를 ‘입건유예’로 선처한 근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사건 초기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유출 동기’에 대해 정반대로 평가했다. ‘본인 의혹 해명이라는 사(私)적인 목적으로 국가기밀을 유출한 것’이므로 ‘정상참작’이 아닌 ‘엄중처벌’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김 전 원장은 대선 전날의 방북 목적, 의도에 관한 여러 가지 의혹을 받아왔고, 이를 가리기 위해 문건을 유출해 자신의 행적을 미화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김 전 원장이 직무상 얻은 민감한 정보를 장사하듯 흘리는 행태의 주기는 4년이었고, 모두 총선 전년도에 이뤄졌다. 이번 발언도 내년 총선을 앞둔 언론 플레이가 아니냐는 뒷말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간에는 지금 김 전 원장이 ‘자기 과시병’ ‘노출증’ 등 중병을 앓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들린다. 인포메이션(information)과 인텔리전스(intelligence)가 어떻게 다른지, 이런 기본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은 그가 한때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책임자로서 어떻게 공직을 수행했는지 자질마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가벼운 언행으로 논란을 일으켜 이미 ‘공공의 적(敵)’이 된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실정법 위반 여부에 대한 검찰 수사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