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배상 판결 ‘소귀에 경 읽기?’
2011-05-24 최은서 기자
[최은서 기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당시 계엄법 위반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한 이신범 이택돈 전 의원에게 국가와 전두환 전 대통령, 이학봉 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이 연대해 10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이 2003년 법원의 재산명시 심리과정에서 밝혔던 전 재산은 29만 원에 불과하다. 때문에 10억 배상판결이 나왔지만 전 전 대통령은 사실상 단 한 푼의 배상금도 내지 않을 공산이 크다. 전 전 대통령이 배상금을 낼 돈이 없다고 버틸 경우 실제 지급능력이 있는 국가가 먼저 배상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국민 세금으로 배상금을 충당하는 셈이다. 이에 이신범 전 의원이 전 전 대통령과 이 전 수사단장에 대한 재산명시신청을 낼 방침을 밝혀 귀추가 주목된다.
1979년 유신체제는 붕괴했지만 ‘12·12 사태’로 신구부가 군을 장악했다. 이듬해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실시했고, 전두환 당시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은 김대중 당시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 공동대표와 지지 세력에 대해 수사를 지시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야당 지도자 김대중과 이신범 이택근 의원, 문익환 목사 등이 정부 전복을 위해 대중을 선동해 일으킨 민중봉기’로 조작해 이들을 내란음모나 계엄법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한 사건이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문익환 목사 등의 인사에게는 실형이 선고됐었다.
당시 이택근 전 의원은 계엄법 위반 혐의로, 이신범 의원은 내란음모, 계엄법위반 혐의로 사전 체포·구속 영장 없이 중앙정보부로 강제 연행 당했다. 이들은 공소사실을 부인했지만, 허위진술을 강요당해 허위자백을 하게 됐다.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돼 이신범 전 의원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고, 이택근 전 의원은 계엄법위반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신범 전 의원은 2년7개월 간 복역하다 형집행정지로 석방됐고, 이택돈 전 의원은 특별사면을 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2004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자 이 전 의원 등은 재심을 청구해 2007년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
이에 이신범 이택근 의원은 전 전 대통령 등의 불법행위를 주장하며 20억 원을 청구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고 재판부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42(이건배 부장판사)는 지난 17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계엄법 위반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한 이신범·이택돈 전 의원이 전 전 대통령과 이 수사단장,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전 전 대통령 등은 연대해서 이신범·이택돈 전 의원에게 각각 7억 원과 3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 전 의원 등은 합수부 수사관에 의해 불법 체포·구금을 당했고, 그 후 고문과 구타, 욕설, 협박 등 가혹행위를 동반한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며 “이에 이택돈 전 의원은 수사관들의 강요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기도 했으며, 이들은 형이 확정돼 복역했는데 이는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내란음모나 계엄법 위반 등 혐의자에 대한 수사라는 직무집행 외관을 갖춰 일어난 것이므로 전 전 대통령과 이 전 단장은 민법에 따라, 국가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일련의 불법행위들로 인해 원고들이 입게 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또 “이 전 의원 등은 재심을 통한 무죄판결을 받기 전까지 손해배상을 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전 전 대통령 등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손해배상 금액에 대해서는 재판부는 “이 사건 불법행위의 반인권적, 조직적 특수성과 불법행위의 중대성, 이 전 의원 등이 가혹행위를 당한 기간, 구금기간, 이 전 의원 등이 입은 정신적 고통을 고려했다”며 “모든 사정을 종합해 전 전 대통령 등은 이신범 전 의원에게는 7억 원, 이택돈 전 의원에게는 3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가 세금으로 배상하나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은 사실상 단 한 푼의 배상금도 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전 전 대통령의 재산은 불과 29만 원. 이날 판결에서는 손해배상액 지급에 대한 가집행도 함께 선고됐다. 때문에 판결 확정 여부와는 관계없이 국가 등은 바로 10억 원을 물어줘야 한다.
이 사건과 같이 연대채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연히 발생한 채무인 ‘부진정연대채무’는 배상 비율이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당사자들끼리 협의를 거친 후 배상 비율 등을 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실제 지급 능력이 있는 국가가 우선 이 전 의원 등에 배상금 10억 원을 물어주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후 국가가 전 전 대통령 등에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으나 전 전 대통령에게 돈을 받아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국가 세금으로 10억 원을 배상하게 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공산이 높다.
이신범 전 의원은 전 전 대통령과 이 전 수사단장에 대한 재산명시신청을 낼 방침이다. 이 전 의원은 [일요서울]과의 전화통화에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인권을 유린한 사람들에 대해 법원이 응징하는 판결을 한 것이다. 전두환씨와 이학봉씨의 잘못 때문에 국가가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니 연대 책임을 지라는 취지에서 두 사람에게 소송을 건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전 의원은 “국가가 구상권을 행사해 두 사람의 재산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전씨와 이씨의 변호사 모두 전씨가 법무법인에서 선임했다. 법무법인을 선임할 경우 최소 5000만 원 이상의 수임료가 든다”며 “전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다는 사람이 어떻게 수천만 원짜리 변호인을 대느냐. 거짓말에 능한 사람이라는 증거인 셈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산명시신청의 취지에 관해서 이 전 의원은 “두 사람이 채무자니까 채권자로서 재산명시신청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재산명시신청을 통해 숨겨 놓은 재산이 얼마가 있는지 살펴 볼 것이다. 또 두 사람의 재산을 공시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인권을 유린한 전씨는 반란의 수괴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렇다면 반성하고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전혀 반성의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며 “전직 대통령 대접을 받고있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 전관예우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이 전 의원은 “이번 판결이 잘잘못을 바로잡고 정리하는 계기가 되야 유족들이나 사망자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역사를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에게 좋은 역사 교육의 자료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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