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정치이야기-31]국민공천제 비웃는 역선택 정치
- 국민을 끌어들여 국민에게 책임 전가 발상
- 기성 정치인들의 기득권 지키는 데 일조
“오픈 프라이머리(open primary. 국민공천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내 탈당하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를 어떻게 수습하는 것이 좋겠는가?” 현재의 여야당 수뇌부를 괴롭히는 가장 큰 골칫거리를 질문 형식으로 나타내면 위와 같은 표현으로 수렴될 것이다.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두 가지 질문이 모두 해당될 것이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앞의 질문이 당면한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위 두 가지 질문은 17대 국회의 마지막 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대통령이 여당을 탈당하고 여당의 국회의원들도 각자도생하겠다며 여당 엑소더스가 한창일 때, 진정한 정당정치를 구현해 보겠다며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문을 두드렸던 필자가 면접관으로부터 받은 질문이다. 앞의 질문은 정치학 교수가 했던 질문이며, 뒤의 질문은 재선의원이 한 질문이었다.
필자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오픈 프라이머리는 총선거 자체가 오픈 프라이머리인데 굳이 당내 공천과정에서 그러한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탈당할 사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탈당시키십시오. 탈당을 빨리 시켜야 그 후의 대책수립도 빨라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소 당돌한 역질문 형식의 답변이었다. 그들이 원했던 답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필자는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공채 당직자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가 위의 두 가지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정당을 ‘현대정치의 생명선’이라고 갈파했던 지그문트 노이만(Sigmund Neumann)의 이야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오픈 프라이머리는 정당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더 나아가 정당정치를 파괴하는 요소가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며, 탈당 문제는 정당이 임의 단체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같은 정당을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두 문제 모두 정당정치의 근간에 관한 문제였으며, 정당정치를 전공한 정치학자로서의 필자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얘기하게 된 것이다.
8년이 지났지만 제1야당의 당면한 문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신뢰의 위기에서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새정치민주연합의 현주소인 것이다. 바뀐 것은 오로지 당의 이름. 열린우리당이 몇 번의 개명을 거듭한 끝에 새정치민주연합으로 간판을 바꿔 단 것 뿐이다. 그들의 고민인 신뢰의 위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며 그들은 그러한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위 ‘안심번호 공천제’라는 것을 고안해냈다. 위기는 정당에 대한 신뢰에 있는데,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국민을 끌어들여 국민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겠다는 발상과 다름 없다.
임기 반환점을 돌아선 박근혜 대통령은 레임덕도 걱정일 테지만 더 큰 걱정은 임기 후의 자신의 안위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홍위병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할 것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내년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해야 하는 당위가 있다. 청와대 출신을 가급적 많이 여의도로 파견 보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간파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한 (청와대에서 요구하는) 전략공천은 없다고 명확하게 청와대에 거부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해 총선공천을 실시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의 공언은 당내 친박계의 반발, 새정치민주연합의 미온적 태도, 시간의 촉박함 등으로 결실을 맺을 수 없게 되었다.
추석 연휴였던 9월 28일, 부산을 지역구로 둔 양당의 대표가 전격적으로 회동하여 소위 ‘안심번호 공천제’를 도입하겠다는 합의를 이뤄냈다. 두 대표 모두 당내 정치적 반대세력들로부터의 공격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차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카드가 절실한 때였다. 이런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전가의 보도가 되어버린 ‘국민의 뜻’이라며 여야당 대표가 변형된 오픈 프라이머리인 ‘안심번호 공천제’를 도입하겠다고 합의한 것이다.
허를 찔린 청와대는 이른바 5대불가론으로 ‘안심번호 공천제’를 합의한 김무성 대표를 공격했다. 역선택으로 인한 민심왜곡 가능성, 여론조사 응답률 저조로 인한 조직선거의 우려, 소모비용 과다로 인한 ‘세금공천’의 우려, 전화-현장투표 간 괴리 문제, 당내 절차를 생략한 졸속 합의 등이 그것이다. 김무성 대표는 이 중 여론조사 응답률이 낮은 부분에 대해서만 맞다고 인정했다.
청와대가 정당의 공천문제에 대해 개입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비난받아야 할 상황인데도, 청와대의 지적에 하나하나 답변을 해야 하는 여당 대표가 웬지 안쓰럽기까지 하다. ‘안심번호 공천제’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한 청와대도 자신들의 본심인 전략공천만 이루어진다면 오픈 프라이머리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할 태세는 아닌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오픈 프라이머리는 이미 ‘정치적 선’의 위상을 획득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정의당의 심상정 대표는 양당 대표가 합의한 ‘안심번호 공천제’를 ‘휴대폰 프라이머리’라고 명명하며, 거대양당이 민주적 정당 활동인 공천을 여론조사로 대체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옳은 지적이다. 정당은 그 책임을 스스로 다하고 국민에게 평가받아야 하는 존재다. 변형된 오픈프라이머리로 국민 뒤에 숨어서는 안된다. 언제까지 오픈 프라이머리 타령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역할을 게을리할 것인가?
미국에서 공직후보자 선출을 위한 개방형 예비선거인 오픈 프라이머리가 도입된 배경에는 정치불신의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로 말미암아 미국에서의 정치불신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현재 미국의 19개 주에서 실시하고 있는 오픈 프라이머리는 정치신인의 진입장벽 문제, 정당정치의 약화문제, 동원형 경선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기성 정치인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미국의 모든 지역에서 이 제도가 실시되지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등 중남미 국가에서 이러한 제도가 실시되고 있지만, 정치선진국이라는 유럽국가중에서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즉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제도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당리당략과 소통부재, 정치불신을 배경으로 공천의 사유화, 계파정치, 줄 세우기가 횡행하며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인 공천이 이루어지자,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탄력을 받고 있다. 공천권을 국민에게 되돌려 주겠다는 그럴싸한 포장에 제도도입의 부의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년 어느 신문사의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에 대한 조사에서, 미국식 오픈 프라이머리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해결이 전제되지 않는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에는 반대한다는 용기있는 주장을 펼친 모의원이 반개혁적 인사로 뭇매를 맞은 상황이 우리를 서글프게 하는 현실인 것이다.
사실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오픈 프라이머리가 됐든 전략공천이 됐든 관심사가 아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겠다고 나온 후보자에 대해서 자신의 기준과 전략적 판단에 따라 후보자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작년 7.30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아성인 순천-곡성 선거구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당선된 것은 지역 유권자의 역선택의 결과다. 유권자는 선거과정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 점에서 오픈프라이머리가 역선택을 방지할 방법이 없다고 노심초사하는 정치권이 우스울 뿐이다. 정당에게 남겨진 숙제는 오픈 프라이머리를 통해 공천권을 국민에게 되돌려주겠다는 감언이설이 아니라, 유권자가 내준 선택과 역선택이라는 고차방정식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있다. <김영필 전북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