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와의 전쟁 10년’ 빈라덴 최후 맞았다

희대의 테러리스트인가 이슬람 수호 영웅인가

2011-05-09     최은서 기자

[최은서 기자] = 9·11 테러 주동자였던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54)이 10년간의 긴 도피생활 끝에 미국의 군사작전으로 사살됐다. 빈라덴은 2001년 9월 11일 미국 무역센터와 국방부 건물을 폭파시켜 최소 2752명을 숨지게 한 테러 배후이자 알카에다 조직 우두머리다. 다른 한편에서 그는 구소련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항거한 이슬람저항운동의 영웅이자, 미국에 맞서는 이슬람 성전의 지도자로 평가된다. 이처럼 빈라덴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무엇이 이토록 엇갈린 평가를 낳게 하는 것일까.

빈라덴은 피델 카스트로(76)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혁명가 체게바라와 비견되기도 한다. 이 세 사람은 ‘미국의 적’으로 지목된 인물들로 반미 전선의 최선두에서 투쟁했기 때문이다. 자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 유지를 추구하는 미국으로선 세 인물 모두 눈에 가시 같을 수밖에 없었다. 카스트로는 세계 최장기 독재자이자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가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체게바라는 사회주의 쿠바 정권 기초를 세운 뒤 볼리비아 내전에 참전해 혁명의 꿈을 이어가다 총살당했다.


민간인 학살한 테러리스트

빈라덴은 이슬람 국가 건설에 가장 큰 방해요인으로 미국을 꼽으며 미국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낸 인물이다.

1991년 걸프전쟁을 전후로 미국을 향한 그의 반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소련이라는 공통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미국 행정부와 사우디 왕실과 손을 잡은 것과는 대비된다. 그가 미국에 대한 태도를 반전시킨 배경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한 미군과 미군상설기지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그는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이슬람 성지를 이교도 미국의 보호 아래 둘 수 없을 뿐더러 미군 기지도 인정할 수 없었다. 또 남녀가 엄격히 구분되는 이슬람 국가에서 국가 수호를 미국 여군에게 맡길 수 없다는 극단적 논리를 폈다.

그는 중동국가들이 미국의 영향력이 완전히 배제된 ‘이슬람 신정국가’가 되기를 꿈꿨다. 그는 사우디 당국이 이 같은 논리를 수용해주지 않자 거침없이 미국과 사우디를 향한 공격을 감행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친미독재 왕정을 엎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미국을 향한 본격 테러에 나선 그는 이집트 과격 단체들과 동맹을 맺고 알카이다를 통해 국제적 테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내려진 부정적인 평가 중 대표적인 것은 민간인 학살이다. 그가 테러리스트 혹은 살인자로 규정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1996년과 1998년 사이 미국에 대한 성전을 다짐하는 3차례의 회교교령을 발표하며, 회교도에게 미군과 민간인들을 살해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이슬람의 이름으로 미군시설에 대한 무차별 공격으로 무고한 인명을 살상했다.

아프가니스탄을 근거지로 활동한 그는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는데, 이 테러로 3000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같은 테러 이후 2003년 9월 육성테이프를 통해 9·11 테러에 대해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고 평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공분을 샀다. 국제적인 시점에서 그는 한마디로 ‘악의 축’으로 규정됐다.

9·11 테러 이후 그는 5000만 달러(550억 원)의 현상금이 내걸렸고, 미국 정보기관들의 ‘공공의 적’ 최선두에 섰다. 미국의 추격을 10년째 따돌리면서도 알 자지라 방송을 통해 육성 성명이나 비디오 메시지 등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꾸준히 냈다. 걸프 지역 일대 산유국 공격 지시를 내리는 것을 비롯, 사우디 지도자들에게 대중 봉기의 위험을 경고하기도 했다. 또 9.11 테러 주동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의 사형이 집행될 경우 그 보복으로 미국인들을 살해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빈라덴의 테러로 미국 역시 이슬람을 향해 ‘대테러 전쟁’을 선포했다. 10년간에 걸친 대테러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가 초토화되는 비극을 낳았다.


반미 지하드 지도자로 자리매김

이와는 반대로 일각에서는 상반된 평가도 존재한다. 10년 가까이 잠행을 거듭해 온 그는 전세계 반미 지하드(jihad)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그는 사살됐지만 반미-반이스라엘 투쟁의 폭발성은 여전히 이슬람권 내에 여전히 잠재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빈라덴 사살 사실이 알려진 직후 이슬람 내에서 그의 죽음을 반기는 분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이슬람을 테러리즘을 동일하게 인식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무장 상태로 어린 딸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살당한 것이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동정 여론이 일파만파 번지며 파키스탄 내에서 반미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가 숨어 지낸 것으로 알려진 파키스탄 아보타바드 245 주택 주변에는 그를 추모하는 무슬림의 발길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는 사살 당했지만, 그의 반미-반이스라엘 투쟁 이념에 동조하는 적지 않은 일부 사람들은 그를 순교자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 남미 민중 해방에 삶을 바친 체게바라에 빗대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는 부유한 사우디아라비아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때문에 평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음에도 초강대국 미국에 맞선 저항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편, 빈라덴 사살에도 불구하고 테러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미국의 친 이스라엘 정책인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 문제와 부패한 친미 독재정권들, 중동지역 미군 주둔 등 근본적인 불만 요소들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choies@dailyp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