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 면제 받으려 한국 국적 포기 ‘있는 자들의 여유?’
고위공직자 아들 병역 비리
연예인은 처벌받지만 고위층 아들들은 쉬쉬
여전한 비리, 입대 후 ‘편한 생활’ 보장하기도
20대 남성 A씨는 군 입대를 앞둔 겨울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친구들과 입대 전 마지막으로 만난 A씨. 이 자리에서 동창이던 B씨는 이 자리에서 술에 취해 그만 실수를 하고 만다. 친구들에게 ‘군대를 제대로 가는 남자는 바보다’라고 말한 것. 입대를 막 앞두고 있던 A씨는 비위가 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B씨의 아버지는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대기업의 고위임원이었고, 입대 전 B씨의 건강검진을 조작했다. 모 병원에 현금 5000만원을 주고 건강검진 기록을 허위 작성한 것이다. 해당 병원은 B씨의 기록표를 바꿨고, 3급이던 B씨는 면제 판정을 받았다. A씨는 “주변 친구들은 모두 알았던 사실로, B의 말실수가 화근이었다”며 동창과 기업의 이름을 본지 기자에 언급했다. 또 “워낙 기업의 규모가 크고, B의 아버지도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누가 군대를 가고 싶어서 가나. 그 이야기를 들었던 친구들 모두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B씨의 사례처럼 건강검진을 조작해 병역 면제나 사회복무요원(공익) 판정을 받은 이들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물론 올해 현역 판정을 받고도 입영을 못한 사람이 5만2000명으로, 많은 이들은 ‘차라리 군대를 가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취업 절벽 등 어려운 사회 현실의 반영일 뿐 ‘군대 면제’는 여전한 논란의 불씨다.
병역 비리 줄었나?
건강검진표를 조작하거나 국적을 바꾸는 등 병역 면제를 위한 꼼수는 늘 사회적 문제였다.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 안규백 의원실이 병무청에 자료를 받아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고위공직자 아들 18명이 국적을 포기해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고위공직자는 사법·행정부를 통틀어 4급 이상의 직위를 가진 이들로 현재 재직 중이다. 자료 공개 당시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체감청년실업률이 10%를 넘긴 지 오래인 데다, 팍팍한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입대를 택한 청년들이 많은 와중에 공개됐기 때문이다.
국세청, 미래창조과학부 등 고위층 18명의 아들들은 국적을 이탈해 병역을 면제받았다. 특히 미래창조과학부 고위 공직자의 아들 4명이 병역 면제를 받아 이 중 가장 많았다. 미래창조과학부의 한 고위공직자는 아들 2명 모두 캐나다 국적을 취득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는 모두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또 외교부 고위 공직자의 아들도 2명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들이 국적을 이탈해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사실은 더욱 문제로 지목되고 있다. 일각에선 건강검진표 조작도 모자라 아예 외국 국적을 취득케 한다며 ‘있는 자들의 여유’라고 비판하고 있다.
국적 포기자들의 증가세 역시 문제로 지목됐다. 한 해 약 4000명의 남성이 병역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국적을 포기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4일 병무청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1만6000여 명이 국적을 포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국적 포기를 한 뒤 병역을 면제받았다. 연도별로는 2012년 2842명, 2013년 3075명, 2014년 4386명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이들의 대부분은 부모의 덕으로 이중국적을 취득한 뒤,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입영대기자가 증가하는 현실과 반대로 국적 포기자도 증가하고 있어 우리 사회의 역설적 면모를 시사한다.
병역 면제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목소리도 높다. ‘고위층의 자제 관리’는 군대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부대를 관리하는 조교에게 ‘잘 봐달라’는 청탁이 들어오거나, 아예 윗선에서 특정 인물을 관리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한다.
입대 이후 비리 만연 ‘그들만의 세상’
C(29·남)씨는 ㄱ도 ㅇ군의 한 부대에서 훈련소 조교 생활을 했다. 입소한 훈련생들을 대상으로 개인정보 관리, 훈련 등 일거수일투족에 책임을 지는 업무였다. C씨는 자연스레 훈련생들의 가족관계를 비롯한 신상을 알 수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고위 층의 자제’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특히 ‘관리 대상’이 들어오면 C씨는 더욱 바빠진다. C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윗선에서 ‘아무개를 잘 지켜보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사실 이런 이야기는 군대 내에서 흔하다면 흔하다”며 “알 만한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함께 입소한 다른 이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역시 당연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실제로 C씨가 조교로 있었을 당시, 해당 군에서 높은 직을 맡았던 공직자의 아들이 입소했다. 같은 시기에 다른 고위공직자의 아들도 동반 입소했다. C씨는 곧바로 윗선에 불려가 ‘두 사람을 편하게 해줘라’는 말을 직접 듣게 됐다. “두 사람 모두 권력이 센 공직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관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특히 중대장이 직접 말한 사항을 어기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고위층 자제들이 받는 가장 큰 혜택은 ‘자대 배치’다. 자대 배치를 어디로 받느냐에 따라 훈련이 제외되는 등 군대 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C씨는 “조교 시절 함께 한 사람은 주민등록상 주소지 근처로 배치를 받았다. 이게 사실은 위법까진 아니지만 규칙엔 어긋나는 것이었다”며 “그는 외출·외박 시 다른 병사들보다 훨씬 이득이 많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사는 지역 내에 위치한 부대에 배치 받는 건 엄연한 규칙 위반인데, 고위공직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편의를 제공 받은 셈이다.
또 C씨는 자신이 부대를 관리하던 시절 PX(군대 내 매점)병 역시 특정 인물이 맡게 됐다고 언급했다. 그는 “위에서 신경을 쓰라는 말을 들었는데, 마침 그 인물이 PX병이 됐다”며 “그 친구는 훈련에서 제외되는 등 무수한 혜택을 누렸다”고 말했다. 또 “행정병으로 가 전산업무만 하거나 중대장 등 높은 사람들의 운전을 모는 운전병으로 간 경우도 많이 봤다”며 “해당 업무는 어려운 일이 아니고, 훈련에서 빠지는 일이 쉽기 때문에 이 역시 특혜는 특혜다”고 언급했다. 주위 병사들이 받았을 소외감, 박탈감 등을 묻는 질문에 “누군가는 당연히 느꼈겠지만, 나에겐 하나의 ‘일’이었을 뿐”이라고 답했다.
유승준법? 고위층부터 솔선수범해야
고위공직자 아들 병역면제 논란이 일파만파로 퍼지자, ‘유승준법’도 덩달아 포털 사이트 검색어에 자주 등장했다. 유승준 법은 지난 6월17일 새정치민주연합 백군기 의원 대표로 발의된 법안이다. 정식 명칭은 ‘출입국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으로, 법안의 발의 목적은 ‘제2의 유승준을 입국 금지시켜야 한다’는 게 골자다.
내용을 보면 ‘최근 13년 전 병역을 기피할 목적으로 한국 국적을 포기해 법무부가 입국금지 조치를 내린 연예인 출신 미국인이 한국 입국을 위해 지금이라도 입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논란이 되고 있음’이라는 대목이 있다. 해당 법률이 발의될 당시, 유승준 씨가 1인 방송인 아프리카 tv에서 한국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한 바 있다. 11명의 의원들이 공동 발의한 이 법안이 결국 ‘유승준’을 겨냥했다는 걸 드러내는 셈이다. 개정안은 법무부가 ‘병역을 기피할 목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하였거나 이탈하였던 사람’도 입국금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뒀다. 법안은 아직 통과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고위공직자 아들, 병역 면제 논란’을 계기로 유승준 법이 통과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법안의 타깃을 일반인·연예인으로만 잡을 게 아니라, 공직자들에게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유승준법’이 통과된다면 법 적용 대상은 ‘모든 국민’이다. 하지만 이 법이 실제로 고위공직자들에게 적용될지는 미지수다. 지금까지 법안 등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있어도, 고위공직자들이 법망에 걸린 적은 소수다.
일각에선 고위공직자의 아들뿐만 아니라, 편법으로 군대를 가지 않은 고위공직자에게 면죄부 자체를 줘선 안된다는 시각도 드러내고 있다.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안상수 경남 창원시장의 일화는 한때 대중의 비웃음을 산 바 있다. 병역 면제 이유가 ‘행방불명’이었기 때문인데, 이를 두고 ‘면제를 받기 위해 꼼수를 쓴 것 아니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졌을 당시, 숱한 비난과 사회적 논란을 가져왔지만 별다른 제재나 조치 등은 없었다. 안 의원 외에도 많은 고위공직자들이 병역 면제 논란은 국민의 분노를 자아낸 바 있다.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온 한 시민은 거리 인터뷰에서 “유승준법도 좋지만, 솔직히 지금의 국회와 사법부 같은 권력집단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며 “비판받을 게 있다면 비판을 받는 등 그들이나 잘 했으면 좋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