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적] TK의원들 대대적 물갈이설
영남권 親이·김무성계 초긴장
청와대 오찬에서 유 의원 자리는 저 멀리…
영남권 중진 물갈이론으로 확산될 조짐
[일요서울 | 장연서 프리랜서]
[장면1] 박근혜 대통령은 8월 21일 대구와 경주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날 오전 대구에 도착해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에서 대구시의 업무보고를 받고 지역 기관장들과 오찬을 한 뒤 서문시장을 방문하는 일정을 잡았다. 또 오후에는 경북 경주로 이동해 ‘2015 실크로드 대장정’ 출범식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이 일정은 당일 북한군이 서부전선에서 포격 도발을 일으켜 청와대에 비상이 걸리는 바람에 전격 취소됐다.
그런데 뒷말이 무성하다. 박 대통령의 대구 방문 일정이 취소되기 전 권영진 대구시장이 대구의 새누리당 국회의원 12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박 대통령이 참석하는 업무보고에 나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권 시장은 “이번 업무보고는 청년 일자리 창출 방안 같은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다. 대통령의 일정도 빡빡하니 회의를 속도감 있게 진행하기 위해 정치인들은 참석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구지역 국회의원들은 의아해 했다. 통상적으로 대통령이 지방을 방문하면 그 지역에 선거구를 둔 여당 국회의원들이 거의 모든 일정에 동행하는 것이 관례다. 따라서 일부 대구 국회의원들은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논의하는 자리에 우리가 안 가면 더 이상한 것 아니냐”고 따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권 시장은 “양해를 해 달라”고 거듭 간곡히 불참을 요청했다.
대통령 대구 경북 방문 취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박 대통령의 대구와 경북 방문 일정이 취소됐다. 경북 국회의원들은 경주 실크로드 대장정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사전에 청와대로부터 받았다가 일정이 전격 취소된 사실을 이인선 경북도 정무부지사가 보낸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통해 알게 됐다.
[장면2] 박 대통령은 8월 26일 천안 우정공무원연수원에서 열리고 있던 새누리당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석한 의원 전원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남북고위급 접촉으로 휴전선에서의 긴장 상태가 풀린 시점이었다.
청와대 오찬장에서 의원들의 좌석 배치는 국회 상임위별로 같은 테이블에 앉도록 했다. 당연히 안보 관련 상임위인 국방위 소속 의원들의 자리는 박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앉은 헤드 테이블 곁에 둘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실제론 국방위 자리가 가장 뒷줄 맨 구석 자리로 밀려났다.
이를 두고 청와대 참모들이 박 대통령의 심기를 알아서 헤아린 결과가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박 대통령으로부터 ‘자기 정치’ ‘배신의 정치’ 당사자로 지목된 뒤 원내대표 자리에서 밀려난 유승민 의원이 국방위 소속인 까닭이었다. 그날 박 대통령과 유 의원은 ‘유승민 파동’ 이후 처음으로 같은 장소에 참석했지만 자리가 멀리 떨어진 바람에 악수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유 의원 입장에선 난감한 일이었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천안 연찬회에 다른 외부 일정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가 청와대 오찬 초청이 있자 한걸음에 달려갔는데 모양이 우습게 돼 버렸기 때문이다.
이 두 장면은 우연히 일어난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아니면 유 의원(대구 동을)은 물론이고, ‘유승민 파동’ 당시 청와대와 친박계에 저항했던 대구지역 국회의원들에 대한 박 대통령의 반감이 여전한 까닭일까.
먼저 권 시장이 박 대통령의 대구 일정에 국회의원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배경에는 청와대의 요청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대구시장이 독단적으로 대구 국회의원들의 참석을 막았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의 현기환 정무수석이 박 대통령의 심기를 살펴 권 시장에게 요청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권 시장과 현 수석은 18대 국회의원 때 한나라당(당시 새누리당) 소속 개혁성향 초선 의원들의 모임인 ‘민본 21’에서 함께 활동한 사이다.
사실 권 시장도 ‘유승민 파동’ 때 유 의원 편에 섰던 입장이다. 당시 권 시장은 “제 정치철학으로는 유 원내대표가 물러날 이유가 없어 보인다. 1차 의원총회에서 신임을 결정해놓고도 눈치만 살피는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비겁하다. 공천 때문에 소신이고 철학이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권 시장이 청와대 요청을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박 대통령의 대구지역 국회의원들, 특히 ‘유승민 지키기’에 나섰던 초선 의원 7명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오찬장에서 유 의원의 좌석을 박 대통령이 앉은 헤드 테이블과 멀리 분리시킨 것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청와대 참모들이 알아서 ‘심기보좌’를 한 정황이 분명히 나타난다.
‘유승민 파동’ 당시 박 대통령의 노기(怒氣)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최근 김무성 대표의 언행에서도 읽을 수 있다. 김 대표는 유 의원과 같이 ‘원조 친박’으로 당 지도부에서 ‘K-Y(김무성 대표-유승민 원내대표) 라인’을 구축한 사이지만 파동 때 유 의원을 보호하지 않았다.
그런 김 대표가 최근 대구 국회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 의원에게 사실상 사과했다. 김 대표는 9월 2일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열린 새누리당 대구지역 국회의원 모임에 참석했다. 이 자리서 김 대표는 유승민 전 원내대표 면전에서 건배사를 하며 “유승민 의원, 사퇴를 내가 못 말려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퇴를 못 말려 미안하다”
박 대통령이 정치적 고향인 대구의 국회의원들에게 크게 반감을 갖고 있다는 분석은 곧 20대 총선에서의 ‘TK(대구·경북) 물갈이론’으로 연결된다.
물론, 김 대표가 추진하는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가 실시되면 청와대든, 당 지도부든 공천에 직접 개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재 분위기는 내년 총선에선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이 어려울 것으로 보이고, 이 경우 청와대가 여당 공천에 개입할 수 있다. 특히 TK 지역에선 PK(부산·경남) 출신인 김 대표보다 박 대통령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장 유 의원이 재공천을 받지 못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다만 인위적으로 유 의원을 공천에서 배제할 경우 중도층의 이탈로 수도권 선거가 어려워질 것이란 지적은 있다. 그런 이유로 대신에 ‘유승민 파동’에서 유 의원을 옹호했던 대구의 초선 국회의원 7명 가운데 상당수가 공천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나머지 재선급 이상 대구 국회의원들도 불안에 떨기는 마찬가지다. 3선의 서상기(북구을), 재선의 조원진 의원(달서병)은 지난해 6·3 지방선거 때 새누리당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권영진 시장에게 패배한 뒤 정치적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
3선의 주호영 의원(수성을)은 비교적 지역구 기반이 탄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주 의원은 이명박 정부에서 특임장관 등을 지내며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박 대통령은 그를 친이계 몫 청와대 정무특보로 발탁했지만 국회 예결위원장 경선을 위해 정무특보직을 사퇴하는 바람에 오히려 박 대통령에게 부담을 줬다.
대구의 국회의원 12명 가운데 초선 7명, 재선 1명, 3선 3명(유승민 의원 포함)이 모두 좌불안석인 셈이다. 나머지 한 명인 대구지역 최다선(4선) 수성갑의 이한구 의원은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수성갑에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대타로 나서 있다.
대구지역 현역 국회의원 대폭 물갈이론은 경북지역 국회의원 15명에게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경북에는 이병석 전 국회부의장(포항북), 강석호 의원(영양-영덕-봉화-울진) 등 친이계, 혹은 계파 색채가 엷은 인물이 다수 있다. 특히 강 의원은 김무성 대표와 중동고 동창으로 돈독한 사이여서 재공천 여부가 주목된다.
‘TK 물갈이론’은 ‘영남권 중진 물갈이론’으로 번질 조짐도 보이고 있다. 이한구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 이미 영남권 중진 의원들이 함께 휩쓸려 가는 것 아니냐는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경남 김해을의 김태호 의원이 다시 불출마를 선언하자 영남권 중진 전체 의원들이 떨고 있다.
부산 중-동구의 정의화 국회의장이 국회수장 출신들의 불출마 관행을 깨고 6선 고지 등정 의사를 밝힌 데 대해 강한 역풍이 일고 있는 것도 영남 중진 물갈이론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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