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의 손학규, 벼랑 끝 문재인 노린다
[추적] 야권 신당추진 세력 군불 여전
모두 문재인을 코너에 모는 시나리오…새판짜기
당 틀 유지 속 비대위 구성, 선대위 조기 출범說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손학규가 산으로 간 까닭은?’
최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핵심 참모였던 A씨가 필자에게 농담을 섞어 던진 질문이다. A씨는 손 전 대표의 정치행태에 실망을 느껴 곁을 떠난 사람이다. 그가 자문자답한 결론은 “하산(下山)하기 위해서”였다.
손 전 대표는 지난해 7·30 수원 팔달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 백련사 뒷산 토담집에서 칩거생활을 하고 있다. 벌써 1년째다. A씨의 ‘하산론’은 손 전 대표의 정계복귀를 의미한다. A씨는 “손 전 대표는 교수 출신 정치인이었다. 만일 그가 완전히 정계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으면 대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산으로 올라간 건 언젠가는 하산하겠다는 의미다. 하산은 곧 세속, 즉 정계로 다시 들어간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손 전 대표가 보여준 그동안의 정치행적도 정계복귀 관측에 힘을 싣는다. 무엇보다 그의 정치적 ‘가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뒤 이듬해 통합민주당 대표로 선출돼 18대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통합민주당은 참패에 가까운 성적표를 얻었다. 그 자신도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 때도 손 전 대표는 산자락으로 들어갔다. 강원도 춘천 대룡산 자락의 한 농가에서 닭을 치며 생활했다. 정계은퇴를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가출’이었다. 산자락에 머물고 있는 그를 정치권 인사들과 기자들이 꾸준히 찾아 간 일도 지금 강진 토담집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2년가량의 가출 생활을 끝내고 집(정치권)으로 돌아온 그는 2010년 10월 민주당 대표로 선출됐다. 이듬해 4·27 재보선에서 진보후보의 무덤으로 불리던 경기 성남 분당을에 출마해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를 꺾은 뒤 화려하게 재기했다.
“손학규, 정치욕심이 넘쳐”
정치평론가 B씨도 “손학규는 정치욕심이 넘치는 사람이다. 외모를 보면 온화한 성품으로 사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에 관해선 탐욕 수준이다. 그동안 보여준 ‘손학규 변신의 역사’를 보면 그런 욕심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B씨의 말처럼 손 전 대표는 원래 민주당 계열 정치인이 아니었다. 처음 정치를 시작한 곳은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자당이었다. 서강대 교수이던 그를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발탁했다. YS는 정치초년생 손학규를 1993년 경기 광명 보궐선거에 출마시켜 처음 금배지를 달도록 지원했다. 광명에서 내리 3선을 한 그는 YS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또 2002년에는 민자당이 이름을 바꾼 한나라당의 후보로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도지사 임기를 마친 직후인 2007년 대선 때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도전에 나선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명박·박근혜 후보의 양강 구도 속에서 그가 설 자리는 극히 비좁았다.
그러자 그는 경선 방식을 문제 삼아 트러블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한나라당과 결별하고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넘어가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이 때 ‘손학규의 정치 행태’에 실망한 많은 참모들이 그를 떠났다. 당내에 세력이 없는 그는 정동영 후보에게 패배했다.
2012년 대선 때도 손 전 대표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후보에게 대선후보 자리를 내줬다. 현재의 새누리당 계열에서 한 차례, 새정치민주연합 계열에서 두 차례나 대통령 꿈을 꿨다는 건 그의 정치욕심이 끝없음을 방증한다. B씨는 “손학규의 네 번째 대권 도전이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손 전 대표의 강진 토담집 칩거 1년이 되는 시점에 때를 맞춘 듯 야권에 새로운 무대가 세워지고 있다. 문재인 대표체제에 저항하는 호남 출신 중심의 비주류 국회의원들이 무대를 만드는 장본인이다. 문 대표를 끌어내려 비상대책 기구를 발족시키거나, 아예 문재인 체제의 새정치연합을 집단으로 떠나 신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다.
현재 비노, 비주류 진영이 구상하는 새판 짜기는 크게 세 갈래다. 어느 경우든 손 전 대표가 진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첫째는 광주의 무소속 천정배 의원 등이 추진하는 중도신당 창당이다. 호남정서가 문 대표를 외면하고 있다고 판단한 광주와 전남 출신 의원들이 신당 창당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다만 ‘호남신당’에 그칠 수 있는 한계 때문에 신당 추진파는 여권에서 소외된 비박계 정치인들을 끌어들여 만드는 중도신당을 염두에 두고 있다. 천 의원이 최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서 물러난 유승민 의원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만일 중도신당이 창당된다면 손 전 대표가 ‘얼굴마담’으로 적격이다.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을 두루 섭렵했기 때문에 이념논란에 구속되지 않는다. 깃발을 들 상품성 있는 인물이 필요했던 중도신당 추진세력 입장에선 그만한 대안을 찾기 어렵다. 손 전 대표로서도 명분이 생긴다. 현재의 야당으로 돌아가기엔 정계은퇴 선언이 발목을 잡고 있던 차에 ‘새 정치’를 표방하면 비판여론을 희석시킬 수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나리오는 새정치연합을 깨지 않고 기존 틀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신당 창당을 하려면 돈과 조직이 필요하다는 어려움이 있고, 실제로 성공할지 여부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차라리 내부에 남아서 판을 흔들자는 구상이다. 구체적으론 문재인 대표 체제를 대체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거나 조기에 총선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실제로 이 방법은 지난 9일 있었던 광주·전남 지역 의원들과 비노 의원들의 전격적인 ‘17인 광주회동’에서 거론됐다. 참석자 일부가 문 대표 퇴진과 이에 따른 비대위 구성을 당 혁신 방안으로 제시했다.
이런 ‘쿠데타’가 현실화 되면 누가 비대위원장을 맡아 당을 이끌지가 숙제로 남는다. 새정치연합 계파는 크게 친노계와 비노계로 나뉘지만 양쪽 모두에 여러 개의 소(小)계보가 있다. 특정 계보의 인물이 비대위원장을 맡을 수 없는 구도다. 여기서 ‘손학규 대안론’이 튀어나온다.
광주회동에 참석했던 이개호 의원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문 대표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의미에서 비노 인사 대신 손학규 전 대표를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한다면 친노들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손학규 비대위원장’ 카드에 부정적인 시각도 당내에 많다. 신당추진파인 광주의 중진 박주선 의원은 11일 한 방송에 출연해 “정계를 은퇴한 분인데 다시 복귀하려면 그만한 국민적인 요구와 성원, 명분이 있어야 할 텐데 지금 그런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고 잘라 말했다.
당내에선 조기에 총선 선대위를 만들자는 주장도 있다. 분당을 피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문재인 대표 체제는 유지하되, 일찌감치 선대위를 구성해 공천권을 위임하자는 요구다. 비노계인 이종걸 원내대표와 가까운 강창일 의원과 비례대표인 홍의락 의원이 총대를 멨다.
강창일 홍의락 의원이 총대
강 의원은 “문 대표에게 계속 사퇴를 요구할 경우 당이 깨질 수도 있기 때문에, 10월 중 조기 선대위를 발족해 공천권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 문 대표는 대표직에 전념하고 공천 문제는 선대위에 일임해야 한다”고 했다. 홍 의원은 한 발 더 나갔다. 계파 수장들이 참여하는 조기 공동 선대위를 만들어 여기에 문 대표를 포함해 정세균·박지원·안철수 의원 등을 참여시키자는 제안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선대위 안에서 공천 지분 문제를 둘러싼 큰 충돌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선대위 구성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손 전 대표가 구원투수 역할을 할 수 있다. 손 전 대표는 계속 대권에 도전해 대중성도
충분한 까닭에 실제 선거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도 당내에서 나온다.
결국 세 가지 시나리오 모두에서 ‘손학규 수요’가 생기는 셈이다. 억지로 정계복귀를 시도하지 않아도 상황변화가 그를 정치권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 다만 세 가지 시나리오 모두는 문 대표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게 된다. 따라서 현재 야권에선 ‘문재인이 죽어야 손학규가 사는’ 구도가 서서히 형성돼가고 있다.
손 전 대표가 강진 토담집과는 별개로 지난 5월에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아파트에서 서울 종로구 구기동의 빌라로 이사를 간 것은 그런 시나리오들이 현실화될 경우에 대비한 정치적 노림수일 수도 있다. 물론, 손 전 대표 측은 여론의 눈치를 살펴 “정치를 다시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손사래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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