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대권플랜 확 바꿨다
미국 방문, 朴 2009년 방문과 유사한 행보
유승민 파동 계기 대통령프렌들리로 방향 수정
당청 대충돌 때 박근혜-김무성 회동 호흡 맞춰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대권 플랜’이 전면 수정됐다. 당초 ‘살아 있는 권력’인 박근혜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미래권력’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던 계획은 일단 접었다. 대신 박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MB) 시절 선보였던 대권행보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7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7박 10일 동안 미국을 방문했다. 이번 방미는 박 대통령이 차기 대권주자 시절인 2009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찾았던 일을 연상시킨다. 일단 수행한 현역 국회의원들의 수가 비슷하다. 박 대통령이나 김 대표 모두 고르고 골라서 핵심 측근들을 데려갔다.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는 8명의 친박계 핵심 의원들이 수행했다. 이 중에는 유정복 현 인천시장,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 등 현 정권 실세들이 포함돼 있었다. 서상기·안홍준·이계진·유재중·이진복·이학재 의원 등 측근들도 일정을 같이했다. 당시 유정복 시장은 박 의원의 비서실장, 이정현 의원은 대변인 역할을 했다.
김 대표의 이번 미국 방문에는 12명의 현역 의원이 함께 나갔다. 최측근인 김학용 비서실장, 김영우 대변인, 이군현·강석호 의원 등이 미국 일정을 같이 했다. 김정훈 정책위의장도 수행했다. 일부 의원은 억지로 미국
현지 일정을 잡아 나중에 합류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 대통령을 수행했던 의원들이 친박계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듯이 김 대표 수행 의원들도 앞으로 ‘무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다만 동행취재 기자단의 경우 박 대통령의 방미 때는 15명이었으나 김 대표는 그 두 배인 30여명이었다. 박 대통령이나 김 대표 모두 동행하겠다는 언론사가 많았으나 대외적인 시선을 의식해 선별했다고 한다.
차기 지도자로서의 자질 과시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방미 일정에도 유사한 점이 많다. 2009년 당시 박 대통령은 전기자동차 제조업체 방문, 스탠퍼드대 특강, 실리콘밸리의 구글 본사 및 한국인 업체 방문, 교민간담회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특히 스탠퍼드대학교 강연에선 북핵 문제와 한반도 정세, 한미 우호증진 방안 등을 주제로 다루면서 차기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과시했다.
김 대표도 이번 방미 기간 동안 미국의 주요 정관계 인사 및 학자, 교민 등을 만났고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한미관계 등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가졌다. 특히 김 대표는 한국전 참전용사들과의 간담회에서 큰 절을 하는가 하면, 워싱턴 특파원 간담회에서는 “우리에게는 역시 중국보다는 미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김 대표가 ‘보수의 아이콘’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결국 2009년 박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방문, 이번 김 대표의 미국 순방은 대권가도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를 답습했다는 의미가 있다. 과거에도 유력한 대권주자들은 한 차례 이상씩 미국을 찾아 국제사회에 신고식을 치르곤 했다.
청와대와 집권여당의 관계가 최악에 달했을 때 미래권력과 현재권력이 ‘담판’을 통해 협력체제를 구축했다는 점도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닮은꼴이다.
MB 정부 집권 3년차인 2010년 당청관계는 최악이었다. 세종시 건설계획 수정 문제를 놓고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의원이 정면충돌했기 때문이다. 한때 결별설까지 나돌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해 8월 21일 단독 회동을 갖고 갈등을 봉합했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공동 노력한다’는 발표문까지 내놓았다.
박근혜 정부 집권 3년차인 올해도 당청 사이에는 내내 냉기류가 흘렀다. 정윤회 리스트,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비박계 사이에 갈등기류가 형성됐다. 그러다 공무원연금개혁법안과 국회법개정안 연계처리에 이은 유승민 파동으로 당청은 정면충돌했다.
한때 청와대의 최종 표적은 김 대표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그러나 김 대표는 5년 전 박근혜 의원이 선택했던 것처럼 오히려 이런 위기상황을 청와대와 관계를 개선하는데 활용했다. 처음엔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입장에 서다가 결국 청와대의 완강한 뜻을 읽고 “대통령을 이길 수는 없지 않느냐”며 유승민 퇴진에 교통정리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전격 회동이 이뤄졌다. 두 사람은 7월 16일 청와대에서 만나 사실상의 ‘신(新)밀월’ 선언했다. 회동에선 “당정청은 하나다”(박 대통령), “박근혜 정부 성공이 우리의 성공”(김 대표)이라며 호흡을 맞췄다. 마치 2005년 이명박-박근혜 회동에서 합의한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공동노력’ 선언을 연상시킨다.
김 대표의 이런 행보는 다소 의외다. 김 대표가 지난해 7월 14일 전당대회를 통해 당을 이끌게 됐을 때 그의 한 측근은 필자에게 “무대(김무성 대표 별칭·무성이 대장)는 ‘MB 시절의 박근혜 역할’로 대권행보에 나설 것”이라고 귀띔했었다. MB 정부 당시 박 대통령이 ‘미래권력’으로서 이명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존재감을 살려나간 일을 그대로 따라할 것이란 말이었다.
‘홀로 서기’
취임 3개월 만에 차질
실제로 김 대표는 취임 초 ‘수평적 당청관계’를 만들겠다며 “청와대에도 할 말은 하는 여당 대표가 되겠다”고 공언했다. 그의 호언장담은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박 대통령의 스타일을 감안할 때 김 대표가 과연 할 말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묻어 있었다.
결국 김 대표의 ‘홀로 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취임 3개월 만에 차질이 생겼다. 지난해 10월 중국 상하이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정기국회가 끝나면 개헌 논의가 봇물이 터질 것이다. 봇물이 터지면 막을 길이 없지 않겠느냐”고 한 말이 발목을 잡았다. 이 발언은 박 대통령이 그 직전에 “개헌논의는 국정현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것”이라며 개헌공론화 자제를 정치권에 요청한 데 대한 반기(反旗)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청와대 윤두현 홍보수석은 “김 대표의 발언이 실수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의중이 실린 ‘경고’나 다름없었다. 이에 김 대표는 “대통령께 송구스럽다”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이때부터 ‘무대 대권 플랜’에 변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과의 거리 두기보다는 ‘대통령프렌들리’로 방향전환을 시작했다. 박 대통령의 핵심 국정과제였던 공무원연금 개혁에 총대를 멨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칭송도 잦아졌다. 때 맞춰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돼 식물총리가 됐고,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 직전 김 대표를 불러 부재 중 국정 챙기기를 당부하며 신뢰를 보냈다.
그러다 유승민 파동을 매듭짓는 과정을 지켜본 박 대통령이 자신을 향한 김 대표의 진정성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으로선 임기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 여당 지도부의 확실한 뒷받침을 보장받았고, 김 대표로선 ‘포스트 박근혜’로서의 위치를 담보받은 셈이다.
대권 플랜을 수정한 김 대표의 행보도 거리낄 게 없어 보인다. 7월 31일 뉴욕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선 “보수 우파가 반드시 정권을 재창출해야 한다. 보수우파가 정권을 재창출하는 데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도와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겠다는 각오를 피력한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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