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단체 20주년 -인터뷰] 김관용 경북도지사
가난한 농부의 아들, ‘현장’ 정치의 대부로
70세 넘는 나이에도 하루 2~3곳 방문, 새마을운동 확산 앞장서
“선거 제도 없었으면 나 같은 사람 도지사 못됐을 것”
[일요서울ㅣ박형남 기자]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장, 지역균형발전협의체회장, 시도지사협의회장 등을 지내며 지방분권확대와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힘썼고, 구미시장 3선, 경북도지사 3선 등 20년간 지방자치단체장을 맡아온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지방자치단체장의 대부로 불리는 김관용 경북도지사다. 그는 현장을 중요시하는 인물로 꼽힌다. [일요서울]과 인터뷰하는 당일인 지난 6월 17일에도 그는 잠시도 쉴 틈이 없어보였다. 경북도 지역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김 지사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지사는 에너지가 넘쳐보였다. 70이 넘은 나이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김 지사는 인터뷰 내내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구수한 입담을 과시, 자신의 인생사를 풀어 헤쳤다. ‘지방자치단체장의 대부’로 불리는 ‘인간 김관용’은 어떤 인물일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삶을 닮은 것 같습니다.” 교사 출신이었던 김관용 경북도지사에게 기자가 던진 말이다. 김 지사는 “그런 말을 듣기도 한다”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다가 군인이 되었고,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
김 지사 역시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7년간 교사생활을 했고,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또 박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을 표방, ‘새마을운동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포스트 박근혜’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이 정도만 해도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공통점이 많다.
특히 지난 1995년 대한민국 민선지방자치의 출범부터 현재까지 구미시장 3선, 경북지사 3선을 연이어 지냈다. 꼬박 20년이 흘렀다. 전국에서 유일한 3선 도지사다. 20년간 지방자치단체장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을 중시하고, ‘사람’을 중시해왔기 때문이다. ‘사람중심! 경북세상’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래서인지 김 지사의 표정이나 어투에서는 에너지가 넘쳐난다. 실제 김 지사를 아는 인사들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현장방문을 2~3개씩 잡을 정도로 체력이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시골 촌부에서 느껴지는 정감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는 평이 많다. 어쩌면 그가 도민들에게 20년 동안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은 김 지사와의 일문일답.
- 20년간 지방자치단체장을 지냈지만 ‘인간 김관용’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
“선비문화의 본산인 경북 구미시 선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는 누구나 다 어려웠듯이 나 역시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농사를 지었다. 먹을거리가 없어서 술지게미 먹고 자라는 등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초등학교 졸업 후에 부잣집 꼴머슴 제의를 받기도 했다. 이때 어머니가 충격을 받으셨고, 끼니 걱정에도 불구하고 대구로 올라왔다. 여공으로 일하던 큰 누님이 학비를 대주신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성격은 어떠했는가.
“농사를 짓고 자연과 함께 어울려 생활했던 터라 자유스러운 편이었다. 어린 시절 영향인지 지금도 자유스럽다.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편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조차 ‘지방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라고 말할 정도다.”
- 눈에 띄는 이력 중 대구사범학교를 나왔던데.
“어린 시절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렵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미대’에 진학했을 것이다. 그러나 집안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결국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구사범학교를 진학했다. 대신 닥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천성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만들어 진다’고 생각한다.”
- 교사시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제가) 중학교 때 태권도를 배웠다. 이를 학교에 최초로 보급했다는 점이다. 1962년 학교 운동회 때 40여 명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학부모들에게 태권도 시범을 보여줬다. 특히 학생들의 머리를 직접 감겨주고, 수건으로 닦아주곤 했다. 그런데 이튿날 수건에 이가 많이 있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구미시장이 됐을 때 그런 학생들을 찾았다. 공부 잘했던 학생들은 취직하고 다른 곳에서 생활하지만 공부를 못했던 학생들은 시골에 남아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웃기는 것은 시골에 남아 농사를 지은 학생들의 경우 땅값이 많이 올라 모두 부자가 되어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했다.”
- 교사생활에 만족했을 법한데 야간대학에 다니면서 행시에 도전했다.
“목표를 정해서 하기보다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다. 또 주변에서 나보다 공부 못했던 사람도 고시가 됐고, 대학도 간다고 하니 열등감이 생겨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가난한 학생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야간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밤 열차 이른바 눈물의 열차를 타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래서인지 젊은 날의 낭만이나 그런 것이 없었던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날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드라마틱’하다고 생각한다. 설명할 수 없는 추억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젊은 학생들을 만나 꿈에 대해 얘기하고, 그런 자체가 행복하다. ‘꿈’이 없어도 도지사도 되고…. 게다가 선거라는 제도가 없었으면 나 같은 사람은 도지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 행시에 합격한 뒤 서울시 용산세무서 서장으로 있기도 했다. 그 당시 생활은 어떠했는가.
“용산세무서장, 대통령민정비서실 행정관 시절은 인정받은 시절이었다. 다만 지금이야 학연, 혈연 지연을 따지지 않지만 70년대 초반은 명문대 출신이 대우를 받았다. 정규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아 한직으로 밀려나는 수모도 겪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양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경험하게 해준 값진 시절이었다. ‘잡초처럼 밟히더라도, 봄비가 내리면 살아나듯’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이 생겼다. 더구나 중앙의 엘리트행정과 달리 직접 현장에 가서 부딪히고 하다 보니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이 역시 구미시장, 경북도지사를 역임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 그러다가 고향에 내려와 구미시장 선거에 도전했다.
“대통령민정수석비서실에서 정치적인 식견을 키웠고, 민선지방자치가 출범하면서 고민을 했다. 이 와중에 친구들과 제자들의 권유가 있었다. 친구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선거에 나오면 적극 지원 하겠다’고 약속을 하기도 했다. 나 또한 구미를 세계일류 도시로, 살맛나는 도시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제약이 많았다. 일례로 ‘스펙’이 걸림돌이었다. 학력은 물론 경력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행정고시 출신이라는 점만 인정받았다. 더구나 상대방 후보에서는 낙하산 공천을 했다고 비방까지 했다. 정말 힘든 선거였다.”
- ‘낙하산 공천’이라고 비방할 때 어떻게 대응했는가.
“‘육군 보병 소총수 출신이기 때문에 낙하산을 타 본 적이 없다’고 연설하는 등 사람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학생들을 가르쳤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여공이었던 누님이 요절을 했다. 나로선 ‘한’으로 남아 있다. 구미시장 선거 당시 공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누님에 대한 얘기를 꺼냈고, ‘이 나라 산업 발전에 여공들이 떠 받쳤던 슬픈 역사,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하며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났다. 다른 후보들은 근로조건 이런 얘기를 하지만 나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이 마음이 통했던지 이후 노동계 지도자들이 나를 지지해주기로 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우리가 골프를 칠 때까지 골프를 안 칠 수 있겠느냐’고 제안을 해와 ‘안 칠 수 있다’고 답했다. 그 약속을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도지사가 골프를 안 치는데 어떻게 섭외해 만날 수 있느냐’고 말을 듣기도 했다.”
- 선거 자체로 힘이 들텐데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는가.
“막상 선거 때가 되니 도와주겠다고 했던 친구들은 전부 농사를 지으러 가고 없었다. 심지어 돈도 조직도 없었다. 이 때문에 선거 홍보, 기획 등 90%이상을 아내와 내가 직접 했다. 초등학교 교사 시절 런닝셔츠 차림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진 하나를 내걸기도 했다. 반응은 좋았다. 이 외에도 모든 현안 등은 현장을 다녀와 검증하고 확인한 다음에 내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진정성이 통했던 것 같다. 그리고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게 됐다.”
- 구미시장을 거쳐 경북지사에 도전하게 됐다. 처음 도전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구미시를 이끌다 보니 경북도 전체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구미시장과 경북지사 선거는 비교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쟁쟁한 후보들이 많이 나왔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경선과정부터 치열했고, 여론조사 등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행정공무원, 구미시장을 지내면서 터득한 ‘현장’을 중요시하며 경북 구석구석을 뛰어다녔다.”
- 현장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닌 것 같다. 부인이 굉장히 싫어했을 것 같은데.
“구미시장에 나간다고 했을 때부터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아내에게 2가지 약속을 했다. 선거에 실패해도 자식 대학교육은 책임질 뿐 아니라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그랬더니 아내가 고심 끝에 승낙을 해줬다. 때문에 아내한테 미안한 점이 많다. 그중 치매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내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는 점에서 깊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다. 게다가 선거는 혼자 할 수 없는데 늘 옆에서 도와줘서 지금의 내가 있었던 것 같다.”
- 도청 사람들이 지사님을 “일중독자”라며 “휴가철에도 휴가없이 일에만 매달린다”고 말하는데.
“휴식. 재충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일밖에 모르고 살아왔다. 해야 할 일은 많고 경상도가 너무나도 넓어 현장을 돌보기 바쁘다.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만 일 중독, 참 헤어나기 어렵다.”
- 도지사 퇴임 후 중앙정치에 도전할 생각은 없나.
“지금은 도지사 직분에 전념하면서 박근혜 정부 3년차 국정운영이 탄력 받고 성공하도록 지원함으로써 대구·경북 발전을 견인하는 것이 소망이자 책무다. 전국 유일의 6선 단체장으로서 중앙과 지방을 있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지방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기본에 충실하고 신뢰를 지키면서, 현장을 지키며 봉사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출판기념회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경북지사를 그만둔 후 6선 단체장하면서 겪었던 것은 물론 지방자치에 대한 문제점 등을 책으로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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