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지/금] 해외투기자본 침투 막자
포이즌필 도입 논의 재점화…기업 체질개선 시급
[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해외투기자본 침투를 막자는 의견이 재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발단은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의 행보가 알려지면서다.
재계는 이번 양사의 대립이 우리 주식시장·기업 구조가 외국 투자자본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로 꼽는다. 따라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게 재계의 입장이다.
‘삼성물산-엘리엇 사태’ 파장 예의주시…위협받는 기업 어디?
과거 외국계 기업 먹튀 사례 반면교사삼아 대응책 마련해야
해외자본의 국내 침투를 더 이상 방치했다가는 한국이 ‘해외 투기자본의 천국’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재계의 공감을 얻고 있다. 단순 투자 목적으로 들어온 기업들이 그 목적을 달리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자본이 침투한 기업들은 대부분 핵심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독창적인 기술로 글로벌화가 가능한 곳들이어서 국가적인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실제로도 2005년 소버린자산운용은 2년이 넘는 SK와 경영권 분쟁 끝에 SK 보유주식 전량을 매각해 8000억원 이상의 차익을 챙겼고, 2006년에는 칼 아이칸이 KT&G를 공격해 1500억 원의 시세차익을 거둔 뒤 한국을 떠났다.
앞선 2003년에는 IMF 외환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외환은행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회사를 매각한다. 이후 6년이 지난 뒤 하나은행은 론스타로부터 외환은행 인수를 선언했고, 올 초 론스타는 3조9000억 원에 재매각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론스타는 배당금을 더 많이 챙기기 위해 외환은행의 대출 금리를 불법으로 조작한 혐의로 논란을 빚었고, 론스타의 이같은 행태는 외국자본의 국내 유입에 따른 대표적인 폐해 사례로 손꼽히며 ‘먹튀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들 기업들은 백기사 영입, 지분 매입 등으로 겨우 경영권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소위 ‘먹튀’를 막을 방법은 없었고 결국 피해를 체감했다.
여기에 이번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그룹이 지배구조 개편과정에서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을 받고 있는 데 대한 충격파가 큰 모습이다.
재계 맏형의 방패막이 뚫리면 현재 지배구조 개편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현대차그룹이나 SK그룹 등 한국 기업 전반으로 파장이 확산될 수 있다는 걱정이 커지는 모양새다.
검은머리 외국인 참여
기업 많아
재벌닷컴에 따르면 지난 4일 기준으로 자산 규모 상위 10대 그룹 소속 상장사 96곳 중 외국인 보유 지분율이 오너 일가나 최대주주·특수관계인 보유 지분보다 높은 기업은 전체의 17%에 달한다.
여기에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SK하이닉스 등 국내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는 기업들이 모두 들어가 있다. 이들은 현재 상황에서는 외국계 투기자본의 공세를 제도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다.
실제로 엘리엇이 삼성물산의 주식을 매입하고 합병 결정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기존 삼성물산 주주는 어떤 선제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재계에서는 미국·일본·프랑스처럼 ‘포이즌필(Poison pill)’이나 ‘차등의결권’ 같은 제도가 있었다면 이렇게 외국계 투기자본에 휘둘리진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포이즌필은 기업의 경영권 방어수단 중 하나로, 적대적 인수·합병(M&A)나 경영권 침해 시도가 있을 경우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을 살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차등의결권제는 주식에 따라 의결권을 차등해서 부여하는 것이다. 둘 다 기존 주주들을 외국계 투자자본의 공세에서 보호할 수 있는 장치다
재계에서는 지금부터라도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투기자본에 취약한 국내 기업 지배구조에 방어장치를 마련하고, 궁극적으로 투명한 경영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경련 관계자는 “올 초 정부의 규제 완화 기조에 따라 4년 만에 포이즌필 도입을 다시 꺼냈지만, 아직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최근 해외투기자본의 문제점이 노출된 만큼 지금이 사회적으로 재논의할 수 있는 적기”라고 말했다.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만나 “해외투기자본들이 계속 국내 기업들을 타깃으로 하고 있는 것은 상법 등 우리의 전반적인 제도나 정책 방향이 잘못됐음을 방증하는 것”이라며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원인을 분석하고 종합적인 대책을 짜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주 보호 vs 사익 추구
또다시 대립
우리나라에서도 포이즌필에 대한 필요성이 IMF 직후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잠잠하다 10여 년이 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에야 ‘친기업 정책’과 맞물려 본격 추진됐다. 2009년 법무부가 ‘한국형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2010년 국무회의를 통과했지만 국회에서 야당과 시민단체의 강한 반대로 무산됐다.
당시 법무부는 “신주인수선택권 도입은 투기적이고 가치파괴적인 ‘먹튀형’ M&A로부터 기업과 주주를 보호하고 기업이 경영권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투자·생산활동에 전념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진 의사를 밝혔지만, 반대 측은 지배주주의 사익추구에 악용될 수 있다며 강력 저지해 흐지부지됐다.
한편 지난 1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부장판사 김용대) 심리로 열린 총회 소집 통지 및 결의 가처분과 주식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삼성물산과 엘리엇은 합병 시기와 목적 등에 대해 치열한 공방을 했다.
삼성물산은 법적 절차에 따라 충분한 평가 기준인 주가를 반영해 합병을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엘리엇은 이번 합병이 주주들의 이익보단 오너 일가의 지배권 강화의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법원은 다음 달 1일까지 이번 합병 관련 주총 소집 등의 적법성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원이 삼성의 손을 들어주더라도 표 대결 등 아직 갈 길이 멀다. 엘리엇을 포함한 삼성물산의 외국인 지분은 33%가 넘는다. 이번 사태는 특히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이 외국계 투자자본에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재계 전반에 미치는 충격파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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