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붙은 국회, 사고 친 유승민
국회법 개정은 고도의 ‘정치공학적’ 산술이었다
김무성의 박근혜 코드 맞추기와 다른 행보
독불장군식 법 개정으로 최대 위기 봉착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는 지난 2월 2일 경선에서 친박계 이주영 후보를 꺾고 여당 원내사령탑에 오른 뒤 정치권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김무성 대표와 ‘K-Y 라인’을 구축하면서 비박계 지도부가 새로운 여당의 길을 개척할 것이란 기대도 모았다. 그러나 불과 취임 4개월 만에 벼랑 끝에 내몰리는 위기를 맞았다. 국회의 행정입법 수정·변경 요구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국회법 개정안 처리를 강행한 데 따른 역풍 때문이다. 유 원내대표는 무엇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렸을까.
유 원내대표는 원조친박 출신이다. 처음으로 박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KDI 출신인 그는 2000년에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았다. 2014년에는 비례대표로 17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런데 다음해 고향인 대구에서 비상이 걸렸다.
당시 대구 동을의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이 선거법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는 바람에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됐다. 그 때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선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나섰다. 진보성향이지만 대구에서 인기가 높은 이 전 수석은 ‘예산폭탄’을 공약으로 내세워 지지세를 넓혀갔다. 자칫 한나라당 심장부인 대구에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탄생할 판이었다.
이강철과 보선 혈투 끝 신승
마땅한 대항마가 없어 노심초사하던 한나라당은 비밀리에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유승민 의원이 가장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다만 비례대표 의원이 의원직을 포기하고 다시 지역구 보선에 나서는 데 따른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유승민 의원은 당 지도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당 대표이던 박 대통령의 간곡한 설득이 있었다고 한다. 유승민 의원은 고전 끝에 52%를 얻어 당선됐고, 곧바로 박근혜 대표의 비서실장이 됐다.
그런 인연으로 원조친박이 됐지만 다른 친박계 정치인들과 달리 유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을 겨냥해 사사건건 쓴 소리를 날렸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국회 국방위원장 시절엔 정부의 국방비 삭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바람에 청와대로부터 “함구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국회 상임위에서 청와대의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을 “얼라들(아이들)”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유 원내대표는 원내사령탑에 오른 뒤 본격적으로 ‘자기 정치’에 나섰다.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 전 대표와 공동 개최한 세미나에서 “진영의 포로가 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후 국회 대표연설에선 ‘신(新)보수’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증세없는 복지’를 “허구”라고 몰아붙였다.
당시 그의 측근 의원은 필자에게 “유승민은 유승민만의 색깔을 갖고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미국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인 유 원내대표가 ‘경제통’ ‘정책통’ 이미지를 각인시키면서 정치권에 만연한 ‘표(票)퓰리즘’에 맞서는 전략으로 국민적 지지도를 넓혀간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유 원내대표가 박 대통령은 물론 김무성 대표와도 차별화해야 미래가 있다고 판단하고 각자도생에 나섰다는 의미다. 실제로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는 닮은 듯 다른 점이 많다. 원조친박은 공통점이지만 태생부터 다르다. 김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에서 정치를 배운 PK(부산·경남)다. 반면에 유 원내대표는 아버지(유수호 전 의원)가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TK(대구·경북)의 리더다.
두 사람의 이런 차이점은 고고도미사일 방위체제(SAAD) 공론화 문제 등을 놓고 미묘한 알력을 벌이는 바탕이 됐다. 김 대표가 상하이 ‘개헌봇물론’ 발언으로 청와대로부터 간접 경고를 받은 뒤 ‘박근혜 코드’ 맞추기에 열중할 때 유 원내대표는 계속 마이 웨이 행보를 보였다.
사드 공론화 등 미묘한 알력
결국 유 원내대표가 공무원연금개혁 법안과 연계된 국회법 개정에 동의한 건 즉흥적이라기 보다는 그의 소신, 신념에 기초한 행위였다고 봐야 한다. 다만 유승민의 소신, 신념이 현재의 여권 상황에서 옳은 것인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남는다. 사실상 ‘좌(左) 클릭’을 한 유승민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 여권에서 폭넓게 나오고 있다.
TK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TK는 보수의 본류다. 유 원내대표의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경북고 동기로, 정통보수였다. 그런 태생적 환경에 있는 그가 신보수, 좌클릭에 나선 데 대해 지역사회에서도 비판 여론이 많다”고 말했다.
당내 친박계는 아예 조직적 반발에 나섰다. 친박계 의원 모임인 ‘국가경쟁력강화 포럼’은 6월 2일 긴급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는 ‘유승민 성토장’을 방불케 했다. ‘유승민 퇴진론’도 등장했다. 장외에서 이재오·정병국 의원 등 과거 친이계가 ‘유승민 구하기’에 나섰지만 큰 힘은 되지 못한다.
유 원내대표가 청와대와 진실 공방을 벌이는 데 대해서도 비판여론이 많다. 논란의 핵심은 개정 국회법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반대 입장이 여당 원내지도부에 명확하게 전달됐는지 여부다.
청와대는 “이병기 비서실장이 ‘공무원연금개혁법안을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국회법 개정은 안 된다’는 입장을 유 원내대표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반면, 유 원내대표는 “‘국회법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말만 했지, ‘공무원연금개혁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더라도 국회법은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른 반박과 재반박이 이어지고 있다.
전 국민이 메르스 공포에 휩싸여 있는 와중에 청와대와 여당 원내대표가 진실공방을 벌이는 데 대해선 양비론이 많지만 무리한 양보로 ‘입법 사고’를 친 유 원내대표가 자숙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야당 원내대표와 달리 여당 원내대표는 당정청의 의견을 조율해서 협상에 나설 책무가 있다. 개인 유승민의 철학으로 협상하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유 원내대표는 협상 대표자로서의 신뢰를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선 여당 원내사령탑 역할 수행이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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