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지/금] 무기명 설문조사 논란
결과만 보고 경고 조치…근절의 발판? 실효성 의문?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00불법을 저지르는 회사 3곳을 적어주세요’ ▲‘00팀장으로부터 부당한 업무지시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00로부터 노조가입을 종용받은 바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누구입니까’
최근 일부 회사에서 논란이 된 설문 내용의 일부다.
이 설문을 실제 돌린 회사의 한 관계자는 “윤리경영 선포식에 앞서 혹시 모를 부당행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돌린 설문이었다”고 표명했다. 방지 차원에서 벌인 사측의 행위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익명이 제대로 보장되느냐는 문제와 향후 이 설문으로 인한 책임추궁이 따른다면 방지 차원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반론도 거세다. 오히려 설문 취지에 대한 논란까지 불거지는 상황이다.
‘익명 진행’ 절차 두고 뒷말…이해관계 배제 어려워
‘동료 간 불신만 키운다’…보완책 필요성 대두
무기명 설문을 돌린 회사 관계자들 다수는 익명을 요구했다.
자신들조차도 이 설문에 의문을 갖고 있고, 이런 일을 한다는 게 외부에 알려질 경우 자사에 대한 이미지 타격을 우려하는 듯했다.
특히 회사 내부 문제를 토대로 설문을 돌리는 회사일수록 이 같은 반감은 더 심하다.
동료 직원 간 신뢰문제가 쟁점화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서로가 감시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같은 공간에서 같은 업무를 하는 직원이 서로를 의심해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일을 하며 취득한 노하우 중에는 정직한 일처리로 얻는 게 있는가 하면 때론 부정확한 방법이지만 서로의 편의를 위해 통용되는 업무도 있게 마련”이라며 “(그런데) 이 모든 걸 끄집어내 잘못으로 해석해버리면 당장 실무부서 직원 간 교류가 끊길 것이며, 이는 회사로서도 큰 손해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무기명 설문에 대해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 기업 담당자도 있다.
윤리경영 선포에 앞서 내부 악재를 도려내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라는 것.
독이 든 성배?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내부에선 꿰뚫듯이 보고 있기 때문에 환부를 도려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설명이다.
이를 토대로 향후 회사가 발전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기대감을 밝히기도 했다.
한 관계자는 “기업이 자성하며 공정거래 질서를 확립하고자 열의를 보이고 있는 이때에 일부 직원의 잘못된 행동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이를 자성하는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조치가 필요하다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회사가 제 살을 깎는 아픔이 있더라도 투명하게 가야 한다는 의지가 이런 토대를 만든 것 같다”며 “이런 설문조사가 단순히 문제제기나 마녀사냥에 그칠 것이 아니라 자정 노력의 의지임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도 최근 50개 제약사로 구성된 한국제약협회 이사회가 지난 14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불공정거래 근절을 목적으로 한 ‘무기명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협회 이사진들이 익명으로 ‘회원사 중 불법 리베이트 행위가 여전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약회사 1개~3개’의 명단과 그 이유를 적어내면, 제약협회가 이를 취합해 다수의 이사들에게 지목된 회원사에게 비공개로 경고하는 방식이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공정거래행위로 사법당국에 적발될 경우 협회 차원에서 가중처벌을 탄원하는 조치를 취할 방침이다.
실효성 의문
제약협회 관계자는 “이번 설문조사 아이디어는 각 제약사 CP담당자들로 구성된 ‘자율준수관리분과위원회’에서 나온 것” 이라며 “이름이 거론됐다는 사실을 CEO에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담감을 느낄 것”이라며 설문조사의 순기능을 강조했다.
하지만 일부 업체들은 무기명 투표가 이사회 본래 취지인 제약업계 발전 방안을 논의하는 것과 맞지 않고 다른 업체들을 지적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는 주장이다.
무기명 투표 방법과 실효성에 대한 업체들의 신뢰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끼리 협약해 제 3자를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도 농후한 데다 최근 제약사마다 자율정화를 통해 리베이트 근절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무기명 설문 조사로 훨씬 이전의 사건이 다시 불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문결과가 나오면 이경호 협회장이 직접 해당 기업을 방문하겠다고 했지만 설문 결과 내용 보안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무기명 설문조사를 하겠다고 나선 것인데 이 역시도 실효성 문제 앞에선 물음표를 그리고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일단 조사권이 없는 제약협회가 설문지에 적힌 기업이 실제 리베이트를 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데다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다 해도 증거 없이 누군가의 일방적 주장으로 시작된 만큼 이 역시 쉽지 않다.
제약사 자체로 근절캠페인을 벌이는 상황에서 이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협회가 앞장선다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기명 투표 방법과 실효성에 대한 업체들의 신뢰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때문에) 기업 내에서 실행 중인 ‘무기명 설문’에 대한 보안책이 더욱 강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며 “부패 척결이라는 점에 모두가 공감하는 만큼 이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