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주사에게 현금 받고 하청업체에게 어음 주는 뻔뻔한 원청업체
하도급법 위반 행위, 기업들 죽인다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하도급업체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가운데 대기업 또는 원청업체들의 하도급법 위반행위로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다. 올 초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하도급업체 137개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한 결과, 하도급대금을 지급하지 않는 등 89개 업체의 불공정 하도급 행위가 적발됐다고 밝힌 바 있다. 문제는 이러한 하도급법 위반행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불공정 하도급거래행위에는 민간기업·공기업 따로 없어
공정위 제재 강화 했지만 기업 불복 소송시 패소율 높아
A건설사는 공기업으로부터 발주 받은 공사를 진행하면서 132억6000만원의 대금(기성금)을 전액 현금으로 받았다. 하지만 670여개 하도급 중소기업에는 22억원(16.6%)만 현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로 지급했다. 발주자에게는 현금으로 받고 수급사업자에게는 어음으로 주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하도급법에서는 원사업자가 하도급대금을 발주자로부터 받은 현금비율 미만으로 수급사업자에게 지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불공정 하도급거래행위
아웃도어 의류제조업체인 B사는 2013년 이후 최근까지 2년 동안 41개 중소기업에게 재단·봉제 일을 맡긴 뒤 1000억원의 하도급대금을 만기 60일이 넘는 어음으로 주면서, 어음할인료 3억3600만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법에서는 원사업자가 하도급대금을 만기 60일 이상 어음으로 줄 때는 해당기간만큼 수수료를 줘야 한다. 공정위의 하도급거래 현장조사에서 적발된 ‘갑의 횡포’ 사례 가운데 일부다.
적발업체들의 위반 행위는 주로 하도급 대금 미지급, 지연 이자 및 어음 할인료 미지급, 어음대체결제수수료 미지급, 법정 어음발행기간 연장, 추가 공사대금 미지급 등이다.
앞서 137개 하도급업체에 대해 공정위가 실시한 현장조사에서 잠정 집계된 법 위반 금액만 150억 원 정도다. 따지고 보면 기업별 1억 원 조금 넘는 금액이다. 대기업들에게는 얼마 안 되는 금액일지 모르지만 영세한 하도급업체들에게는 이 돈은 큰 액수다. 게다가 이들 기업은 이 작은 금액조차 몇 달 동안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후 대·중소기업 간 공정한 거래질서 확립을 최우선과제 중 하나로 추진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불공정 하도급거래행위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공정위는 피해를 본 수급사업자들이 최대한 빨리 하도급대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적발된 기업들에 최대한 빨리 자진 시정하도록 유도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 기업은 엄중 제재를 가하고 있다. 자진시정 업체는 과징금 부과 없이 단순 경고 조처한다.
하지만 법위반 기업들이 자진시정을 하면 가벼운 경고로 끝나는 공정위의 대처 방식이 오히려 불공정하도급 행위의 근절에 도움이 안 된다는 비판도 있다.
공공기관도
불공정행위 자행
불공정거래행위는 민간기업 뿐만이 아니다. 공공기관들도 거리낌 없이 불공정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에는 도로공사, 철도시설공단, LH(한국토지주택공사) 등 주요 공공기관들이 국가계약법에 명시된 설계변경 단가와 달리 자체 공사계약 특수조건을 만들어 운영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설계 변경 때 부당한 특례조항 준수를 강요하거나, 공기연장 추가비용 미지급 등 부당한 계약조건을 강요한 것이다.
공사기간 연장 등으로 추가 비용이 발생하면 공공기관은 이를 건설사에 떠넘기고 건설사들은 결국 공사기간 단축과 값싼 자재로 대체하는 부실공사로 이에 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참다 못한 건설사들이 최근 공공기관을 상대로 소송에 나서기도 했다. 정작 공정거래행위를 지향해야 할 공공기관에서 버젓이 불공정행위를 일삼는 상황인데 민간기업의 상황은 안 봐도 뻔하다.
불공정 하도급거래행위가 끊이지 않자 공정위는 올해 ‘회초리’를 꺼내 들었다. 담합 행위 등의 불공정 행위에 대한 제재 강도를 높인 것이다. 하지만 제재에 불복하는 소송이 크게 늘어났고, 확정 판결에서 공정위의 패소율도 높아졌다.
지난 10일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해 사건처리 건수는 4079건으로 전년도 3438건에 비해 18.6% 늘었다. 과징금 부과건수는 113건으로서 전년(89건) 대비 27% 증가했고, 부과액은 8043억원으로 전년(4184억원)대비 92.2%나 급증했다. 건당 평균 과징금도 약 71억원으로 전년(47억원)보다 51%나 늘었다. 공정위의 제재가 심해진 것이다.
‘회초리’ 꺼내 든
공정거래위원회
위반유형별로 보면 부당한 공동행위(담합) 95.7%(7694억원)로 과징금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불공정거래행위 1.6%(127억원), 하도급법 위반행위 1.3%(104억원) 순으로 나타났다. 담합 과징금이 급증한 이유는 지난해 굵직한 담합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호남고속철도(13개 공구) 입찰담합 건은 28개 사업자가 담합했다가 3478억원을 부과 받았다.
그밖에 인천도시철도 2호선 턴키공사 입찰 건도 21개 건설사에 1322억원이 부과됐고, 백판지 5개 제조사에 대해서도 1056억원이 부과되면서 과징금 규모가 부쩍 커졌다.
문제는 피심인들과의 소송에서 공정위의 패소율도 높아졌다는 점이다. 지난해 공정위가 처리한 345건의 처분 중 소송제기 건수는 71건(20.6%)으로 소제기율이 전년(12%) 대비 8.6% 높아졌다. 이는 소송을 통해 과징금 부담을 완화시키려는 피심인들의 성향이 더욱 짙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해 판결이 확정된 사건은 132건으로 그 중 전부승소가 80.3%(106건)이고, 일부승소 6.8%(9건), 전부패소 12.9%(17건)로 집계됐다. 전부승소율은 전년(73.6%)보다 6.7%포인트 높아졌지만, 전부패소 역시 전년(5.6%)보다 7.3%포인트나 높아졌다.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처분만 강하게 내렸기 때문이다. 면밀한 조사와 증거 입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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