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성 잃어가는 기업들의 장학·문화재단 실태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 사건 이후 국내 정치·사회계가 큰 혼란에 휩싸였다. 일명 ‘성완종 리스트’가 발표되면서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성 회장과의 관계와 금품수수 혐의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특별수사팀은 진실을 가리기 위해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성 회장이 자살 이틀 전 동생들을 불러 가족회의를 개최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장학사업을 이어가달라는 당부를 한 것으로 알려져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모기업 위한 재단’ 아닌
‘특징 있는 재단’ 필요
국내에서 기업인들이 장학재단을 운영하는 것은 오랜 전통처럼 여겨진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나 부를 축적한 뒤 장학재단이나 문화재단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순서처럼 여겨질 정도다. 게다가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기업들도 앞다퉈 다양한 재단을 만들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 대부분도 장학·문화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사실 재단의 순수한 목적은 기업이 고객들로부터 벌어들인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있다. 학생에게는 장학금을 시민들에게는 다양한 문화·복지 혜택을 줘 기업과 사회 그리고 시민들이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기업의 재단을 생색내기나 각종 사건 발생 시 문제 해결을 위한 보험용으로 쓰기 위해 만드는 경우가 있어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한다.
서산장학재단
인맥 쌓기 위한 발판?
최근 모든 언론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는 고 성완종 회장도 장학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서산장학재단이다.
성 회장은 초등학교를 중퇴한 뒤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 자수성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연과 지연이 성공의 필수요소다. 하지만 성 회장은 학연이 없었다. 대신 지역 인맥을 활용해 성공기반을 닦았다. 그 결과 국회의원까지 당선됐고 매출액 2조원 규모의 경남기업도 인수했다. 말 그대로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서산장학재단은 1990년에 만들어졌다. 약 31억 원의 사재를 기부해 충남 서산 지역에 대한 향토애 진작과 인재양성 및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1991년 9월에 재단설립허가를 받은 서산장학재단은 1993년 1월에는 서산시 및 태안군의 24개 읍면동에 지부를 설립하고 1995년 3월 5개 분과 60명으로 이뤄진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서산지역에 뿌리를 뒀지만 태안, 대산, 아산, 당진 등 충남지역 외에 인천에까지 지부를 설립했다.
서산장학재단은 장학 사업, 문화 사업, 복지 사업, 교육 사업 등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다. 특히 장학 사업으로 1991년부터 2010년까지 중학생 7,808명, 고등학생 6,207명, 대학생 3,446명에게 각각 약 28억 4327만원, 42억 3141만원, 35억 9137만원 등을 지급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생 487명에게는 2억 4450만 원을 지원했다. 최근까지 총 1만 8048명에게 약 108억 3935만원의 장학금이 지원됐다.
에티오피아, 태국 등 해외 지원자까지 포함하면 약 2만 여명의 청소년에게 200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성 회장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2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성 회장의 노력과 애착이 없었다면 서산장학재단은 그냥 지역의 이름없는 장학재단으로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원 인원이나 지원금 규모만 놓고 보면 결코 작은 장학재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경남기업의 해외자원외교 비리 의혹을 둘러싸고 검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하는 도중 일부 장학생들이 재단 홈페이지에 “더러운 돈을 받았다”는 등의 글을 남기자 큰 상처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에서 서산장학재단 장학생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향후 조사 결과에 따라 어떤 발표가 나올지 주목 받고 있다.
최근 롯데월드몰·타워 운영·투자사들도 장학재단을 설립한다고 밝혔다. ‘송파롯데장학재단’이다. 이 장학재단은 송파지역 인재육성을 위해 롯데월드몰·타워의 운영·투자사인 롯데물산, 롯데쇼핑, 롯데호텔 등 3개사가 분담한 50억원의 기금으로 설립될 예정이다.
송파롯데장학재단
지역 갈등 해결용?
재단을 통해 조성된 장학금은 송파에 거주하는 구민 자녀, 송파구 관내 학교에 재학중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적이 우수한 학생 약 300여명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지난달 5일 개최된 창립이사회엔 롯데, 송파구 지역 대표 등 각계에서 구성된 이사진들이 참여해 설립취지문 채택, 정관심의, 이사장 선출 등 장학재단 설립을 위한 안건을 심의 의결했다. 이사장으로 윤종윤 유아이그룹 회장을 선출했다.
롯데 측에서는 “장학재단 설립을 통해 앞으로 송파지역 구민들과의 상생과 지역 우수인재육성에 앞장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송파주민들은 이 재단이 제2롯데월드 건설로 불거진 여러 가지 문제들을 무마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애초부터 장학재단을 만들 계획이었다면 제2롯데월드 건설 이전부터 했어야 했다는 의견도 있다. 롯데월드가 송파에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됐는데 이제 와서 송파주민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든다는 것이 싱크홀이나, 교통대란 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롯데 측에서는 롯데물산이 매년 송파구 지역 내 저소득층 가정을 지원해 오고 있었다.
현대차 그룹은 다양한 재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은 정몽구 재단이다. 정몽구 재단의 원래 이름은 해비치재단이다.
정몽구 재단
재판 과정서 설립 약속
정 회장은 2007년 배임·횡령 등 혐의로 기소돼 받은 재판의 항소심에서 2013년까지 8400억원 상당 사재 출연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재판은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돼 사재 출연에 대해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졌다.
하지만 정 회장은 사회와 한 약속을 이행하는 차원에서 1500억원 상당 사재를 출연해 해비치재단을 설립했다. 이후 2011년 개인 기부액으로는 사상 최고액인 5000억원을 추가해 재단을 꾸려오고 있다.
현대가에서 만든 최초의 공익재단은 1977년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건설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설립한 아산사회복지재단이다. 정 명예회장의 호인 ‘아산’을 따서 재단 이름을 지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현재 아산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의 동생인 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도 2011년 8월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KCC, 현대산업개발, 현대백화점 등 범현대가의 힘을 모아 5천억 원 규모의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다. 당시 이 재단은 2012년 대선을 염두에 둔 행보라는 해석이 많았다.
꽃과 어린왕자 재단
정권 코드 맞춤 지분 기부
재단은 사회공헌이 목적이지만 새 정권과 ‘코드 맞추기’를 위해 활용하는 기업도 있다.
코오롱 그룹이 대표적이다. 이웅열 코오롱 회장은 2013년 3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스위트밀 지분 19.97%를 모두 비영리 어린이 장학재단인 ‘꽃과 어린왕자 재단’에 기부했다.
스위트밀은 코오롱그룹의 외식 프랜차이즈 계열사로 2004년 설립됐다. 베이커리 전문점 ‘비어드파파’, 커피전문점 ‘스위트 카페’, 치즈케이크 전문점 ‘티오글라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스위트밀은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지분 57.14%를 갖고 있고 2012년 발행한 전환사채를 인수한 일본의 외식업체 무기노호가 22.89%로 2대 주주다. 이웅열 회장도 19.97%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출범과 더불어 대기업이 골목 상권까지 독식한다는 ‘재벌빵집’ 논란이 커지자 이 회장이 지분을 처분키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코오롱 그룹 측도 기부 이유에 대해 ‘동반과 상생의 시대적 요청’이라고 밝힌 바 있다.
스위트밀의 2012년 매출은 39억원이었다. 당시 사업규모가 작아 ‘재벌빵집’ 논란에서 제외됐었다. 하지만 스위트밀이 고속도로 휴게소와 로드숍까지 진출한 터라 사업을 확대할 경우 대기업이 일본 브랜드를 들여와 중소기업 업종을 노린다는 지적이 있었다.
‘꽃과 어린왕자’는 코오롱이 2002년 우정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어린이 장학사업 재단법인이다. 이웅열 회장이 2004년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2007년부터는 이 회장의 부인 서창희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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