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신간] 사랑의 멍에

2015-04-10     홍준철 기자

- 삶의 멍에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아름다운 비상      
- 인생의 예술화를 완성하기 위한 치열한 인생 설계도

미국에서 건축가로 성공하는 등 아무것도 부족할 것 없어 보였던 주인공 승혁은 어느 날 어렵게 쌓아 올린 사회적 지위는 물론 단란했던 가족마저 버리고 갑자기 귀국한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남편의 말을 들은 부인 석영은 승혁의 친구이자 중진 언론인인 화자 대식에게 남편의 마음을 돌려달라고 부탁한다.

친구의 부인인 석영을 완벽에 가까운 여자라 생각하며 은근히 흠모하던 대식은 그런 승혁을 거세게 비난하지만, 승혁은 대식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안온한 삶을 버리고 귀국한 진짜 이유를 밝힌다. 오십 고개를 앞두고 틀에 박힌 삶에 갇혀 지내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지 고민하던 끝에 지금까지의 성공한 삶을 모두 버리고 인생의 밑바닥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는 중년 남성의 위기에 관한 것이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한 끝에 성공이라는 결실을 거두지만 정작 자신이 추구하던 이상은 저버리게 된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작품은 중년의 남성이 언젠가 한번 겪게 되는 위기의식 속에서 인생 전체의 문제점을 발견하고자 한다. 게다가 이는 중년 또는 남성에게만 해당하는 주제가 아니다. 틀에 맞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 본연의 자유와 진정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모든 사람이 고민하고 있으며, 또 고민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중년 남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으면서도 그 세대의 경험에 한정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형태를 창출하기 위한 모험을 감수하고 있다. 주인공 승혁이 바로 그러한 모험을 주도하는 인물이다. 작품에서 승혁은 세상사에 달관하고 어떠한 유혹에도 쉽게 이끌리지 않는 노회한 중년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야 할 삶을 성취의 과제로 삼고 있는 야심찬 젊은이와도 같다.

그는 자유를 속박하는 멍에를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낯선 삶을 향한 모험을 시도하지만 사회의 상식은 그런 모험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승혁은 그런 시선을 비웃듯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유를 획득한다. 작품은 언뜻 참담해 보이는 결론을 통해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폭넓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건축가로서 성공한 삶, 안정적인 가정, 거의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원하는 삶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승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름 아닌, 국보 1호인 남대문(숭례문)을 웅장하고 빛나는 건축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예술가로서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자 승혁은 서해의 한 바닷가 마을에 머물면서 돌 쌓는 법을 연구하기 위해 방파제 축조현장에서 인부로 일하거나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붕장어를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어부가 되기도 한다.

그런 승혁에게 친구인 대식은 “가족에 대한, 사회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면서 자기의 직업에 충실한” 정상적인 생활이 그립지 않느냐 묻는다. 승혁은 “우리 속에 갇힌 채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 찌꺼기를 매일 배부르게 먹고 언젠가 도살장에 끌려갈 때를 기다리는 돼지”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디오크러티란 인류의 가장 나쁜 적이야. 영혼에 기생하는 암이지. 이 암이 영혼을 죽이면 그 인간은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돼.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평범’이라는 균에 소멸되고 있어. 나는 우리에 갇힌 돼지가 먹이를 찾듯이 매일매일 같은 시간대에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눈에 서려 있는 원망과 공포를 봤어. 또한 여러 분야에서 일단 성공한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도 같은 원망과 공포의 눈초리가 번뜩거리지. 그들 모두는 이미 사고하고 창의하려는 인간이 아니고 우리에 갇혀 던져주는 음식 찌꺼기나 받아먹는 돼지야.』 (본문 중에서)

이처럼 이 작품은 속물근성에 젖은 이 시대 보편적인 생활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시도한다. 반면 안정된 삶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삶을 다시 시작하려는 승혁과 달리 화자인 대식은 그런 친구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도 결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물이다. 오히려 승혁의 이른바 ‘비상식적인’ 행동에 대한 반작용처럼, 대식은 처세로 쌓아 올린 지위를 지키고 확장하는 데 골몰한다.

결국 완성을 보진 못하지만 이 작품에서 남대문은 승혁이 추구하는 삶의 진정한 모습에 다름 아니다. 예술가의 진정한 행복은 창작에 있다는 것,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삶이 예술이라면 화려한 장식 같은 조건들이 아닌 삶 그 자체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삶의 멍에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는 길이라는 확신을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이번 작품은 60년 분단의 상흔을 이겨내고 이 시대의 저속한 상업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홍상화 작가의 『전쟁을 이긴 두 여인』과 『우리들의 두 여인』에 이어, ‘한국문학사 작은책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홍상화/한국문학사/232p/9,000원

[저자 소개]
작가는 서울대 상대를 나와 기업인으로 활동하다 1989년 장편 『피와 불』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작품을 영화로 각색하여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 소설 『거품시대』는 조선일보에, 『불감시대』는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되었으며, 장편소설 『피와 불』(『꽃 파는 처녀』로 개작) 『거품시대』(전 3권) 『디스토피아』 『신⋅한국의 아버지』, 연작소설집 『우리 집 여인들』, 소설집 『전쟁을 이긴 두 여인』 『우리들의 두 여인』 등이 있다. 2005년 소설 「동백꽃」으로 제12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 『피와 불』은 일본 도쿠마문고에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