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팬 대신 펜든 14인아줌마
‘펜 수다’로 이웃소통 전도사 등극
2009-12-08 류세나 기자
14명의 아줌마들이 부엌 문을 열고 사회로 나와 글작가로 변신했다. 가정에 꽁꽁 매여 ‘밥 차려주는’ 엄마 또는 아내로 한정된 생활을 해왔던 그들이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펜을 들고 밖으로 나온 것. 아줌마들의 글쓰기 커뮤니티 ‘줌마네(zoomanet.co.kr)’는 오는 12일 아줌마 회원들이 기획에서부터 취재, 집필, 디자인, 홍보, 배포까지 전 과정에 참여·제작한 국내 첫 아줌마 지역잡지 <동네 한 바퀴 더> 창간호를 발간한다. 이 잡지는 줌마네 글쓰기 강좌를 수강한 아줌마들이 직접 마포구 연남동 곳곳을 돌아보며 완성시킨 작품으로 숨어 있는 지역 봉사자, 알아두면 좋은 지역정보 등 정감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펜 하나로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일요서울]이 들어봤다.
밥을 차려주는 엄마의 모습은 자연스럽지만 어쩐지 펜을 들고, 혹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영 어색하다. 장을 보러 나가는 아내는 익숙하지만 취재하러 나가는 아내의 모습 또한 낯설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줌마네 글쓰기 강좌 수강생들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고 당당하게 ‘글작가’라는 이름으로 자아찾기에 나섰다. 지난 3월부터 10월까지 제10기 강좌를 수강한 18명의 주부회원 가운데 14명이 아줌마표 지역잡지 <동네 한 바퀴 더> 작업에 참여했다. ‘동네’가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아줌마들이 ‘지역주민들간의 관계 맺을 길을 만들자’는 의견에 뜻을 모은 것.
이 잡지의 배경은 줌마네 공부방이 자리 잡고 있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이다. 회원들마다 각각 거주하는 지역은 다르지만 ‘자아찾기’를 도와 준 동네이기 때문에 연남동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남다르다. 지난달 25일 오후 2시, 줌마네 공부방을 찾았다.
자아찾기는 물론 성격개조까지 ‘OK’
“아이고, 아직 많이 부끄러운 솜씬데….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 잡지편집과 관련된 책으로 공부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새로운 편집기술 하나를 발견하면 옆에 있는 엄마들하고 손뼉치면서 좋아해요. 너무 너무 재미있어요”
줌마네 10기 강좌 디자인팀 박은위 팀장은 컴퓨터 모니터로 자신이 편집디자인한 화면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나마 박 팀장의 경우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베테랑급에 속한다. <동네 한 바퀴 더> 제작에 참여한 아줌마들 중 유일하게 관련된 일을 해 본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10년 전에 딱 한번, 카달로그 제작을 해봤을 뿐이다. 모두들 의욕은 프로급이지만 경험면에서는 아마추어인 것. 이러한 14명의 아줌마들이 모여 기획단계에서부터 취재, 사진촬영, 홍보 등 전 제작과정을 전문가의 도움 없이 손수 해냈다. 그들의 노고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광고주 섭외를 담당했던 김진희씨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광고주의 도움도 필요했다. 동네 약국, 꽃집, 치과 등을 돌며 광고주를 섭외했다”며 “5천원을 받고 광고를 실어주는 조건이었는데 가게 주인들은 나를 잡상인 취급하며 문전박대 했다”고 전했다.
김씨는 이어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한 소소한 것을 알리고 소통의 창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인데 ‘먹고 살기 편하니까 글을 쓰는 것 아닌가’ ‘자기 자아실현하는 것에 내 돈을 내놓으라고 하네’ 식의 눈총을 받아 마음이 아팠다”고 덧붙였다.
취재와 기사작성, 일러스트를 맡았던 김소연씨는 취재원 섭외·취재과정을 통해 소극적이었던 성격을 고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저는 원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서 말을 걸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취재를 하기 위해서는 취재원을 섭외하고 또 그들과 친해지기 위한 시도들도 필요하잖아요. 한번은 동네 할머니들과 친해지기 위한 작전을 펼쳤던 적이 있었어요. 할머니들이 뭘 좋아할까, 날씨가 추우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이 좋을까, 따뜻한 음료는 어떨까 등을 놓고 고심한 끝에 동네슈퍼에서 따뜻한 병두유 십여 개를 사서 덜그럭 덜그럭 대면서 가슴 팎에 안고 갔던 기억이 나네요. 예전 같았다면 제가 낯선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죠”
김혜진씨는 “동네에 숨어있는 작고 소박한 곳을 찾고 있던 중 네일샵 한 귀퉁이에 ‘아메리카노’ ‘생과일주스’ 등의 종이를 붙여놓고 음료를 판매하는 곳을 발견했다”며 “가게 사진을 찍고 간단한 소개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아르바이트생이 사장님의 허락 없이는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하더라”고 회상했다.
김씨는 이어 “내가 취재 때문에 그렇게 문전박대 당해보니 기자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알겠더라”며 “그래서 여기 모인 아줌마들은 언론사 등에서 오면 친절하게 대한다”고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평소엔 화기애애, 글 평가할 때는 냉혹하게
확실히 줌마네 작업실은 아줌마들만 모여 있어서 그런지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기자가 작업실에 머무는 내내 정겨운 수다와 함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작지만 아기자기한 작업실 분위기도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업실 벽 곳곳에 오밀조밀한 액자가 붙어 있는가하면 동화 속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또 ‘역시 아줌마’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도 눈에 띄었다. 감귤껍질차를 끓여 먹겠다며 작업실 한 귀퉁이에 귤껍질을 말려 놓고 있었다. 생활의 지혜가 떠오르는 대목.
‘아줌마’라는 공통점으로 뭉쳤지만 이들은 사는 지역이 다른 것처럼 나이 역시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허물없이, 격식 없이 지내고 있는 듯 보였다. 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줌마네 식구들은 ‘유사 가족공동체’다.
3월 이후 가족만큼 자주 만나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간에 별칭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들은 실명 대신 ‘엄네’ ‘바구니’ ‘낡은 카펫’ ‘바다’ 등의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었다. 30대부터 50대까지의 다양한 연령층의 이들이 세대간 장벽을 뛰어 넘어 서로를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로 대했기 때문에 더욱 화합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아줌마로 살면서 남편, 아이 등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익숙해져서인지 서로 생각이 다른 여러 명이 함께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찰이 없었어요. 하지만 서로의 글을 평가할 때는 냉혹하죠. ‘이렇게 밖에 못쓰냐’고 따끔하게 말하기도 해요. 듣기엔 ‘칭찬’이 좋지만 상대방을 성장시키진 못하잖아요. 그래도 그 때 말고는 항상 화기애애한 분위기예요”
글작가 꿈 향해 1보 앞으로 전진
이들이 만든 <동네 한 바퀴 더> 창간호는 3천부를 찍어 연남동주민센터, 동네 미장원, 꽃집 등 지역사회와 시민단체에 무료로 배포될 예정이다.
마포구 연남동에 10년 넘게 살면서도 숨어 있는 작은 샛길을 모르는 이웃에게, 전입신고를 하러 온 새 주민에게, 언젠가 새로 지은 아파트로 입주하겠다는 소망으로 동네를 사랑할 기회를 만들지 않고 있는 이웃들에게 이 잡지를 보도록 권유하고 싶단다.
이와 관련 김혜진씨는 “너무 크고 유명한 사건과 장소들은 이미 다들 알고 있다. 내가 매일 생활하는, 내 가까이에 있는 소소한 것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소연씨는 “연남동의 진가를 알리기 위해 작지만 의미있는 것들을 찾다보니 나에게도 세심한 안목이 생겼다”며 “연남동에 플라타너스 길이 아주 예쁜 곳이 있는데 알고 보니 우리 동네에도 비슷한 곳이 있었다. 시각을 달리 하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잡지를 보는 사람들도 이런 것들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힘든 부분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결과물만큼은 자신 있어요. 이번 잡지제작을 계기로 글작가로의 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줌마네’는 어떤 단체?
아줌마들의 공동체 ‘줌마네(대표 이숙경)’는 2001년 홈페이지 오픈과 동시에 글쓰기 강좌 1기생을 모집, 매년 20여명의 수강생들에게 강좌를 진행해 오고 있다. 줌마네 수강생들은 단행본·잡지 발간, 책읽기 모임, 인문학 프로그램 등을 통해 아줌마 자유기고가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들이 써내는 글들은 에세이, 소설, 동화처럼 형식도 다양할 뿐 아니라 교육, 육아, 가정, 환경 등 주제도 갖가지다.
10기생까지 배출한 지금, 글쓰기 강좌를 수강했던 ‘아줌마’들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을 넘어 자신과 더불어 남들도 행복하게 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니게 됐다.
자신이 집필한 연극을 만들어 직접 연기를 하기도 하고, 영화를 찍기도 한다. 이처럼 줌마네는 아줌마들이 펜 하나로 세상과 소통을 시작할 수 있도록 다각도로 돕고 있다. <류>
[류세나 기자] cream53@dailysun.co.kr
[사진=맹철영 기자] photo@daily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