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추적 서래마을 영아살해 사건그 후 3년
“왜 죽였냐고? 더 이상 아이는 필요없으니까”
2009-06-16 이수영 기자
지난 2006년 여름 서울 반포동. 유복한 프랑스인 부부가 살고 있는 가정집 냉동고에서 꽁꽁 얼어붙은 갓난아기 시신 두 구가 발견됐다. 놀랍게도 어린 생명을 죽여 냉동실에 보관한 엽기적인 살인범은 그 집 안주인인 주부였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래마을 영아살해·유기사건’의 범인이자 숨진 아기의 친모인 베로니크 쿠르조(Veronique Courjault·41)씨가 사건 3년여 만인 지난 9일(현지시각) 정식으로 법정에 섰다.
2006년 당시 한국 경찰은 DNA 감식 등 첨단 과학수사 방식을 총동원해 베로니크의 유죄를 명쾌하게 입증한 바 있다. 그러나 쿠르조 부부는 “한국경찰의 수사방식을 믿을 수 없다. 모국에 따로 수사를 의뢰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귀국길에 올라 도피 논란을 빚은 바 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베로니크는 자식 둘을 살해한 범인으로 프랑스 현지 경찰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더구나 그가 한국에 건너오기 전인 1999년 프랑스 오를레앙의 자택에서 갓 태어난 또 다른 자녀도 목 졸라 살해했으며 시신을 벽난로에 불태웠다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 국내 뿐 아니라 프랑스 전역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3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프랑스 전역은 베로니크와 그가 저지른 범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그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범행동기가 재판 과정에서 낱낱이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서래마을 사건’의 새로운 진실과 남은 의혹을 <일요서울>이 짚어봤다.
르몽드(Le Monde)와 르피가로(Le Figaro) 등 프랑스 유력 언론들은 최근 ‘희대의 패륜모’ 베로니크의 재판 과정과 당시 한국 경찰의 수사 결과 등을 대서특필하며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다.
관련 매체들은 베로니크의 범행 과정이 엽기적인데다 죄질이 지극히 불량하다는 점을 들어 최소 ‘무기징역’이상의 형이 확정될 것으로 내다봤다. 프랑스 형법에 따르면 15세 미만 미성년자를 살해한 이는 법정 최고형인 무기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베로니크는 1999년과 2002년, 2003년 자신이 낳은 아기 3명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돼 수감됐다.지난해 2월 그는 중죄 재판소로 이송돼 정식 재판에 회부됐고 지난 9일 1심 재판이 프랑스 서부 투르 지방법원에서 시작됐다. 베로니크가 구속 수감된 지 약 2년 6개월 만이다.
TF1 방송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베로니크는 시종 초조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재판에 임했다. 그는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눈물을 쏟으며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임신 거부증 환자”vs“비열한 거짓말쟁이”
현재 가장 중요한 이슈는 베로니크가 온전한 정신상태에서 살인을 했는지 여부다. 만약 베로니크가 범행을 저지를 당시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면 그에 대한 형사처벌 수위는 대폭 낮아진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베로니크는 ‘임신 거부증’ 환자일 가능성이 높다. 임신 거부증이란 임신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는 여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아이를 갖지 않았다’고 여기는 정신착란의 일종이다.
수사 당시 베로니크는 범행동기를 묻는 질문에 “이미 아이가 둘이나 있어 더 이상 자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임신 중절도 생각했지만 수술을 받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베로니크만의 ‘논리’에 수사팀은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수사팀은 곧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 4명을 투입해 베로니크의 정신분석을 진행했다. 베로니크 뿐 아니라 남편 장 루이 쿠르조(Jean Louis Courjault·43)씨까지 포함한 심리검사는 무려 6개월 이상 걸렸다. 이는 베로니크에 대한 1심 공판이 미뤄진 이유기도 하다.
마침내 2007년 5월 담당 의료진은 쿠르조 부부의 정신감정 결과를 발표했다. 4명의 전문가 가운데 일부는 “베로니크가 임신 거부증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밝혔다.
반면 또 다른 전문가들은 “베로니크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철저하게 거짓말을 꾸며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즉 베로니크의 정신질환 여부는 명확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라는 얘기다.
때문에 베로니크의 ‘임신 거부증’은 재판 과정에서 적잖은 논란거리가 될 전망이다. 베로니크를 직접 면담한 정신분석가 소피 마리노폴로는 최근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임신 거부증에 걸렸다고 모두 자식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 혼자 출산을 하게 되면 극심한 단절감과 공포에 사로잡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임신 거부증에 시달리는 여성은 스스로 ‘아이를 갖지 않았다’고 생각해 태아에 대한 모성애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베로니크의 증세와 상당부분 유사하다.
세 번째 살인 저지른 뒤자궁적출
그러나 베로니크는 ‘DNA 분석 결과’라는 외통수에 몰리기 직전까지 자신의 혐의를 조목조목 따지며 부인한 바 있다. 그가 ‘정신질환자’이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는 ‘연약한 여인’이라는 일각의 동정론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이유다.
‘서래마을 영아 살해사건’은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이 저지른 엽기적 폐륜범죄라는 점과 대한민국의 과학수사 수준을 국제적으로 과시했다는 데서 의미가 크다.
당초 경찰은 쿠르조 부부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남편은 시신을 발견하고 곧바로 신고한 당사자였을 뿐 아니라 외국계 자동차 부품회사의 고급 임원으로 신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베로니크 또한 각각 11살, 9살 난 두 아들을 키우는 선량한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매달 1000만원이 넘는 수입을 올리며 264㎡(약 80평) 남짓한 고급 빌라에 사는 선진국 출신 일가족에게 ‘범죄 용의자’ 낙인을 찍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였던 남편의 프랑스인 친구 F씨와 필리핀 출신 가정부 L씨가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사팀은 죽은 아기들과 쿠르조 부부의 관계를 캐기 시작했다. 쿠르조 가족들이 사용하던 빗과 칫솔 등 DNA 채취와 관련된 증거물을 수집한 경찰은 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로 넘겼다.
사건 신고 엿새 만인 2006년 7월 29일 국과수는 놀라운 결과를 통보해왔다. “죽은 아기들은 남편 쿠르조씨의 친자식”으로 밝혀진 것이다. 남편은 “절대 그럴 리 없다”며 펄쩍 뛰었지만 열흘 뒤 국과수는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다.
바로 아기들의 친어머니가 쿠르조씨의 아내 베로니크라는 것이었다. 베로니크가 쓴 칫솔과 귀이개에서 얻은 DNA 지문이 아기들과 정확히 맞아떨어진 까닭이다. 당시 경찰의 최종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2002년 8월 임신한 채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 들어온 베로니크는 남편이 출장 중이던 같은 해 말 욕조에서 혼자 아기를 낳았다.
갓 태어난 핏덩이의 목을 졸라 죽인 베로니크는 시신을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해 아기를 수건과 비닐로 싸맨 뒤 평소 잘 쓰지 않는 냉동고 구석에 무려 3년 8개월 동안 처박아둔 것이다.
불행히도 다음해 2월 베로니크는 또 다시 임신을 했고 같은 해 11월 낳은 아기 역시 같은 수법으로 살해해 유기했다. 한 달 뒤인 2003년 12월 베로니크는 출산 후유증으로 산부인과를 찾았고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았다. 의사에게는 “복막염이 번졌다”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잘못된 출산으로 인한 자궁 감염 때문이었다.
“내가 베로니크였다면…” 섬뜩한 실화소설
자국민이 저지른 엽기적 폐륜행각에 프랑스도 충격에 빠졌다. 쿠르조 부부와 관련된 소식은 이후 현지 유력 언론 사회면 톱으로 다뤄질 만큼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사건 발생 1년여 만인 2007년 8월에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실화소설이 출간되기도 했다.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딸로 최근 작가로서 유명세를 탄 마자린 마리 팽죠(Mazarine Marie Pingeot)가 쓴 소설 ‘인형들의 묘지(Le Cimetiere des poupees)’가 바로 그것이다.
소설에는 어머니(베로니크)가 갓 태어난 자식을 살해하고 유기하는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됐다. 또 베로니크가 한국에 오기 전 살해한 또 다른 아이를 어떻게 벽난로에 넣어 태웠는지도 실감나게 그려졌다.
팽조는 책 발간에 앞서 서래마을 영아 살해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소설을 썼음을 공개적으로 밝혀 사회적 논란을 부추겼다. 논란의 이유는 자명했다. 당시는 쿠르조 부부에 대해 어떠한 법적 판결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던 탓이다.
언론에 따르면 소설이 출간되자 쿠르조 부부의 고향인 오를레앙 쉬농 마을주민들은 책 판매 금지를 요청하는 서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실제 사건과 너무 비슷해 불쾌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한편 베로니크가 체포된 이후 프랑스에서는 유사한 영아살인사건이 꼬리를 물고 벌어져 수사팀을 당혹케 했다.
2006년 10월과 11월 프랑스 중부·남부 도시에서 갓난아기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는가 하면 2007년 11월 프랑스 동부에선 30대 여성이 아기 시신 3구를 냉장고와 상자 등에 넣어 수년간 방치한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3월엔 프랑스 북서부에서 아기를 죽인 뒤 1년 동안 냉장고에 보관한 4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여성 역시 베로니크처럼 남편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