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복서 출신 탈영병 실패한 ‘예고살인’
“내 안의 ‘악마’가 죽을 때까지 찌르라고 명령했다”
2009-06-02 이수영 기자
“난 복수할 것이다.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죽일지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고 있지만 만인 앞에 공개되는 프로복싱과 달리 살인계획은 보안이 생명이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하지만 명단은 공개할 수 있다.” 대학진학까지 포기할 정도로 권투가 너무 좋았던 프로복서가 탈영과 살인미수를 저지른 정신질환자로 ‘변신’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일주일이었다. 탈영한 지 열흘, 공개수배 이틀 만인 지난달 26일 검거된 황용익(21) 일병의 엽기적인 행적에 네티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황 일병은 여자친구와 모텔에서 촬영한 ‘은밀한 사진’을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버젓이 게시하는가 하면 성격장애 판정을 받고 입원한 병실 안에서 감시카메라를 향해 알몸을 드러내고 자위를 하기도 했다. 그는 도저히 정상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마치 훈장처럼 자랑하며 비뚤어진 ‘자기애’를 과시했다. 잘나가는 인터넷 스타에서 살인미수범으로 전락한 황 일병의 기괴한 범행일기를 <일요서울>이 단독 입수했다.
인터넷 스타, 현실선 ‘외톨이’
황 일병은 ‘6전 6패의 삼류프로복서’라는 타이틀로 수차례 주요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했을 만큼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였다. 그가 직접 운영하는 복싱 관련 인터넷 카페의 유효회원수는 3000명이 훌쩍 넘는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명성을 떨치던 황 일병은 정작 사회생활에서는 ‘외톨이’였다. 2007년부터 그에게 권투를 가르친 D체육관 관장은 “(황 일병이)워낙 고집이 세 주위에 사람이 별로 없다. 외톨이인 셈이다”고 말했다.
특히 남의 이목을 끌고 싶어 하는 또래 청년들에 비해서도 황 일병의 ‘자기애’는 지나칠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를 ‘복서 Jeep’라고 불렀으며 탈영한 이후에는 자신을 ‘살인마 Rape(성폭행·강탈)’라고 불렀다. 그는 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홈페이지에 사진과 함께 기록했다. 황 일병의 홈페이지에는 지난해 헤어진 여자친구의 실명을 거론해 쓴 ‘이별선언문’뿐 아니라 모텔객실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본인의 나체사진까지 당당하게 게시돼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황 일병에 대해 ‘자애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정신과 전문의 진용택 박사는 “직접 면담을 하지 않아 확진을 내리기 어렵다”고 전제하면서도 “유달리 과시성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남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상당히 강한 것으로 볼 때 자애성 성격장애의 일종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자애성 성격장애 환자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들은 자기 과시적 환상에 사로잡힌 것 외에는 생활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만을 위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 대인관계에 큰 결함이 있다.
진 박사는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자신의 특이성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것을 즐기며 스스로에게 특별한 명칭을 부여하거나 대인관계에서 잦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 등을 들수 있다. 노출증 역시 자애성 성격장애 환자들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다”고 말했다.
황 일병 사건의 핵심은 5명의 살인계획을 밝힌 그가 탈영 이후 살인을 실행에 옮기려 했는지 여부다. 일부 언론은 황 일병이 여자친구 A양을 공격한 시점이 ‘살인리스트’를 작성한 이후라고 보도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살인계획’은 관심 끌려는 이벤트?
황 일병은 ‘살인리스트’를 작성하기 전 A양을 ‘가위’로 공격했고 A양이 목숨을 건졌다는 것을 확인한 뒤 문제의 리스트를 작성해 인터넷에 공개했다.
황 일병은 지난 16일 ‘모텔에서 촬영한 은밀한 사진을 유포하겠다’며 A양을 협박해 일산 백석동의 한 모텔로 끌고 가 A양을 성폭행하고 흉기를 휘둘렀다.
황 일병은 일기를 통해 ‘영화에서는 한번만 찔러도 잘만 죽던데 역시 영화는 영화다’ ‘(A양이)살려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질려버리고 말았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범행을 저지른 뒤 황 일병은 택시를 타고 도주하는 와중에도 A양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어 무사한 것을 확인했다.
황 일병은 이후 “A양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고 둘러댔지만 몇 가지 정황을 종합해볼 때 그가 살인에 대해 상당한 공포심과 거부감에 시달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황 일병은 이후 부대에 복귀하지 않았고 범행 사흘 뒤인 지난달 19일 자신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A양을 포함한 5명의 ‘살해 리스트’를 올렸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망이 좁아지자 그는 스스로 문제의 글을 삭제해 몸을 사렸다.
진 박사는 “자애성 성격장애자들은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거짓말 하는 데 특히 능하다”며 “황 일병이 여자친구를 찌른 뒤 불안감을 이기기 위해 오히려 더 ‘센 척’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경찰과 군 당국을 긴장하게 만든 ‘살해 리스트’ 자체가 비정상적인 자기애에 빠진 황 일병이 준비한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유달리 자기애가 강한 나기에 혀는 못 깨물었다.” 본지가 입수한 황 일병의 일기에는 자살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자살은 하고 싶지만 자기애 때문에(?) 고통은 참을 수 없다는 황 일병. 그는 경찰에 검거된 뒤 헌병대로 이첩 돼 처벌을 기다리고 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