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200억대 재산가 죽음의 결정적 단서
박살난 휴대폰에 찜찜한 것있었나
2009-05-19 이수영 기자
지난 1월 22일 오전 11시 4분. 서울 서초구의 한 고급빌라 주차장에서 피에 젖은 변사체가 발견됐다. 숨진 피해자는 빌라 소유주인 이모(51)씨. 쓰러진 이씨의 곁에는 박살이 난 그의 휴대전화와 희미한 발자국 한개 만이 남아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지 넉 달. 그러나 경찰은 용의자 추적은커녕 변변한 단서조차 손에 쥐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다. 보통 살인범죄는 사건발생 1주일이 지나면 미제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 이상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기 힘든 상황이라는 얘기다. 경찰은 범인의 살해수법과 용의주도한 도주 과정을 바탕으로 이씨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 킬러에게 살해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의 추측이 정확하다면 과연 누가, 무슨 이유로 이씨를 살해하기 위해 이 같은 대담한 모험을 벌인 것일까. 넉 달 전 사건이 벌어진 문제의 빌라 지하주차장으로 돌아가 잃어버린 결정적 단서를 추적했다.
이씨의 휴대폰이 원흉?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피살된 이씨의 소지품이다. 검은색 양복 차림이었던 이씨의 상의 안주머니엔 현금 40여만원과 신용카드가 들어있는 두툼한 지갑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범인이 금품을 노리고 범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 이씨의 휴대전화는 박살이 난 채 시신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휴대폰은 안에 담긴 내용이 복구조차 되지 않을 만큼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범인이 일부러 짓밟아 부쉈을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다.
범인은 왜 이씨의 소지품 가운데 유독 휴대폰에만 손을 댄 것일까. 가능성은 두 가지다. 흉기에 찔린 피해자가 숨지기 직전 휴대폰으로 제3자에게 도움을 청하려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휴대폰을 부쉈을 것이라는 게 첫 번째 가설이다. 둘째는 이씨의 휴대폰 안에 범인으로서는 심히 거슬리는 ‘그 무엇’이 담겨있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범인은 이씨의 휴대폰을 직접 챙겨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장에서 이씨의 휴대폰을 복구 불가능의 상태가 되도록 짓밟았다. 일종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피살자의 심장을 비롯한 급소 4곳을 흉기로 쑤셔 숨지게 한 대담한 살인범은 이씨의 소지품 가운데 유일하게 휴대폰을 못 쓰게 만든 뒤 유유히 자취를 감췄다. 처음부터 피해자를 살해할 목적으로 접근한 범인에게 있어 부서진 휴대전화는 단순한 소지품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부터 죽일 작정이었다”
이씨는 P빌라를 포함해 오피스텔과 모텔 등을 소유한 200억대 재산가였다. 수사팀이 사건 해결에 자신감을 보인 이유도 이씨와 채무관계에 얽힌 지인들을 탐문하다보면 금방 용의자의 윤곽이 잡힐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판단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이씨에게 500만~3000만원씩 빚을 진 채무자와 임대과정에서 마찰을 빚은 세입자를 포함해 100여명을 대면 조사했지만 이렇다할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
부인과 대학생인 두 아들을 둔 이씨는 가정생활에서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명확한 살해동기를 가진 인물이 아직까지는 없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범행현장에 찍힌 희미한 족적 한 개를 제외하고 완벽하게 증발해 버린 범인은 수사팀이 CCTV에 찍힌 차량번호를 추적할 것이란 사실도 미리 꿰뚫어 경찰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범인이 탄 차는 2006년 2월 이후 생산된 진주색 그랜져 TG로 사건현장 인근 10여대의 CCTV에 포착됐다.
그러나 CCTV 확인 결과 이씨 소유의 에쿠스 번호판은 선명하게 보였지만 그랜져의 흰색 번호판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경찰은 용의차량을 추적하기 위해 국과수와 방송사, 영화사, 대학교 등을 돌며 감식을 요청했지만 하나같이 헛수고였다.
경찰 관계자는 “10여대의 CCTV에서 확보한 용의차량의 번호판이 완벽하게 뭉개졌다. 범인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미리 반사 스프레이를 뿌린 뒤 범행현장을 오갔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도 답답한 노릇이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이 ‘청부살인’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에 용의주도한 도주수법 못잖게 수사팀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범인의 능란한 칼솜씨다. 숨진 이씨는 178cm의 키에 80kg으로 탄탄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는 평소 축구와 골프로 다져진 스포츠 마니아로 5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장했다.
범인은 그런 이씨가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할 만큼 흉기를 다루는데 능숙했다. 그는 이씨의 심장 등 급소 4곳을 한번에 꿰뚫었고 이는 모두 치명상이었다. 처음부터 범인은 이씨를 죽일 작정으로 흉기를 휘둘렀다는 얘기다. 200억의 재산과 심장을 꿰뚫은 칼부림, 그리고 박살난 휴대폰. 미궁으로 빠져든 살인사건은 마치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찾는 과정을 떠오르게 한다. 잘나가는 50대 재산가를 싸늘한 주검으로 만든 대담한 범인의 정체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