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한 보석 도둑, 생활체육회 여성들에 인기

40대 남자 여장하고 보석상에 치밀하게 접근

2009-05-12     윤지환 기자
영화 속 이야기 같은 사건이 실제로 발생해 눈길을 끈다. 경기도 안산단원경찰서는 지난 7일 여장을 하고 귀금속업자에게 접근, 수억 원대의 귀금속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가법상 절도)로 박모(46)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가짜 남편 역할을 한 김모(47)씨를 불구속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달 17일 오후 8시 40분께 귀금속도매업자 김모(46)씨에게 '현금 6억원이 준비됐다. 귀금속을 가져오라'며 안산시 단원구 아파트로 유인한 뒤 김씨가 한눈을 파는 사이 금괴 1㎏ 등 2억 5000만원 상당의 귀금속을 들고 도주한 혐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여장남자가 진짜 여자보다 더 여자 같아 여자들의 예리한 눈썰미로도 허점을 전혀 노출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사결과 박씨는 여장을 한 채 귀부인으로 행세, 안산지역 생활체육회에서 수개월 동안 활동하며 귀금속도매업자 김씨 부부와 친분을 맺은 뒤 재테크를 위해 귀금속을 구입하겠다고 속여 범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주민등록증도 여성의 것으로 위조하고, 보증금 4000만원에 월세 100만원의 135m²형 (41평형) 아파트를 호화롭게 꾸며 임시거처로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철저하게 상류층 귀부인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안산지역 생활체육회 여성들과 긴밀한 친분을 쌓았다. 여성회원들은 박씨가 여장남자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한 여성회원은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남자 같은 느낌이 살짝 스치긴 했다”며 “하지만 여성으로 행동하는 게 워낙 자연스러웠고 중년여성이었기 때문에 설마 남자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회원이 “아직도 박씨가 남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말할 정도로 박씨의 여자 연기는 그럴 듯 했다.

이 회원뿐 아니라 다른 회원들도 박씨가 여장남자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빠지지 않고 체육회활동을 한다는 이모씨는 “박씨가 여장남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너무 놀라서 한동안 진정이 되지 않았다”며 “어떻게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성격도 좋고 운동도 잘해서 아무 고생 없이 사는 부잣집 사모님이라고만 생각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박씨에 대해 “분장을 안 하면 다소 마르고 평범한 중년 남성이지만 여자로 분장을 하면 누가 보더라도 40대 중년 여성”이라며 “외모보다 말투나 행동이 중년여성의 특징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여성처럼 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생활체육회 완전정복

박씨는 170㎝의 키에 날씬한 체격이었고, 긴 파마머리에 늘 짙은 화장을 하고 다녔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경찰은 박씨와 같이 활동했던 생활체육회원들 중 그 누구도 박씨가 남자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김숙자(가명·43)씨는 “박씨는 걸음걸이나 웃음 등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며 “경찰은 박씨가 여자형제들이 많아 여자행세를 잘 했다는데, 개인적으로 그것보다 박씨는 연습을 매우 많이 하고 연구도 많이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박씨는 상대를 완벽히 속이기 위해 가짜 남편까지 소개했다. 박씨는 경찰조사에서 “가짜 남편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부부로 행세하는 연습을 많이 했다”고 진술했다.

박씨와 가짜 남편은 허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전에 대본을 준비해 놓고 연습한대로 행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호화 아파트 외에도 에쿠스를 렌트해 몰고 다니며 귀부인 행세를 했다. 체육회원들은 “박씨가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운동도 잘하는데다 돈 많은 귀부인으로 보였기 때문에 회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전했다. 특히 운동은 남자인 박씨가 다른 여성회원들을 압도했다. 박씨는 회원들이 운동을 잘한다고 칭찬하자 “어릴 적부터 이런저런 운동을 많이 해 봤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그런 박씨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자신을 위장해 먹잇감을 물색하던 박씨는 체육회에서 귀금속도매업자 김모(46)씨를 알게 됐다. 박씨는 섣불리 김씨에게 자신의 의도를 노출시키지 않았다.


가짜 남편과 콤비플레이

박씨는 가짜 남편과 함께 김씨에게 접근해 자신이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가짜 남편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주로 박씨가 나서서 말했다. 호흡이 맞지 않아 거짓이 탄로 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박씨는 어느날 김씨 부부를 만난 자리에서 “재테크 수단으로 귀금속을 사고 싶다”며 슬쩍 말을 흘렸다. 이에 김씨 부부는 귀금속 재테크에 대해 설명했다. 이를 들으며 맞장구를 치던 박씨는 김씨 부부가 자신의 술수에 넘어왔다고 판단하고 “재테크할 수 있는 값비싼 귀금속들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김씨 부부는 금괴 등 귀금속 2억 5000만원어치를 준비했다.

박씨는 지난 4월 17일 오후 8시40분쯤 “현금 6억원을 준비했다. 귀금속을 가져와달라”며 김씨 부부를 안산시 단원구의 아파트로 유인했다. 박씨와 가짜 남편은 김씨 부부를 집으로 끌어들인 뒤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김씨 부부가 한눈을 파는 사이 귀금속을 모두 챙겨 그대로 달아났다.

김씨 부부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아파트 주변 CCTV에 잡힌 용의차량을 확인해 공범인 가짜남편을 검거하는데 성공했다.

경찰은 가짜남편에게서 기막힌 진술을 들었다. 가짜남편은 박씨의 신원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며 다만 박씨가 여성이 아니라 여장남자라고 털어놨다. 이에 경찰은 동일수법을 저지른 전과자들을 조사한 끝에 박씨의 신원을 파악했고, 의정부에서 다시 범행을 준비하고 있던 박씨를 붙잡을 수 있었다.

경찰관계자는 “박씨가 어릴 적부터 누나 3명과 함께 성장해서 여자 말투나 행동을 자연스럽게 구사했다"고 말했다.

이밖에 경찰은 박씨가 서울과 대전 등지에서도 유사 범행을 저질렀을 것으로 보고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