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뒤흔든 ‘미생’
“고통을 늘리는 것이 장그래 법이냐”
2015-01-05 강휘호 기자
[일요서울|강휘호 기자] “정규직과 계약직,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계속 일을 하고 싶은 겁니다.” tvN 드라마 미생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등장한 주인공 장그래의 대사다. 장그래는 정규직 전환을 목표로 달렸지만 결국 계약기간 2년을 끝으로 회사를 떠나야만 했던 인물이다. 아울러 이러한 모습은 비정규직 노동자 1000만 명 시대를 앞둔 씁쓸한 현실과 맞닿아 많은 이들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런데 고용노동부가 지난달 말 발표한 비정규직 종합대책은 오히려 드라마 미생보다도 비정규직들의 공감을 사지 못한 모습이다.
비정규직 종합대책…노사정 갈등 고조
협의 단계서 각계 패키지 딜 가능성도
실제 노동 시장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장그래들은 정부안 비정규직 종합대책이 장그래 죽이기 법이라면서 원성을 내고 있다. 미생을 통해 파생된 격한 감정이 노동계와 재계를 막론하고 번지는 상황이다.
장그래는 “내 인프라인줄 알았는데, 잠깐 빌린 것이었다…같은 사람이고 싶다. 저런 사람들처럼”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장그래의 이름을 빌린 법안은 정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계약직 기간을 4년으로 늘리는 내용을 담고 있기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35세 이상 비정규직 근로자가 원하면 4년까지 같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됐다. 고용안정을 위해 기간을 2년 더 늘린다는 설명이다.
계약직 기간이었던 4년이 모두 지난 뒤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고 계약을 해지했을 땐 이직수당을 지급하도록 하는 부분도 명시됐다. 이와 함께 파견 허용 대상에 55살 이상 근로자가 추가됐고, 생명·안전 업무에는 비정규직 사용을 제한했다.
3개월 이상 근무한 비정규 근로자에게 퇴직급여를 보장하도록 하는 항목도 추가됐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정규직 전환을 촉진하고, 차별과 비정규직 남용을 막자는 것”이 해당 대책안의 골자다.
그러나 이번 비정규직 종합대책은 “말은 그럴싸 하지만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최악의 ‘장그래 죽이기 법’”이라는 평가가 팽배하다. 거의 모든 노동계와 실제 ‘장그래’들이 반발에 나선 상황이다.
우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이미 한상균 위원장 당선자가 반노동·반민주로 치닫는 행위로 규정, 총파업으로 막아내겠다며 2015년 민주노총의 위력적인 총파업투쟁을 선언하고 나선 상태다.
한상균 당선자는 ‘장그래’를 죽이며 ‘장그래’ 살리기로 연출하고 있다”면서 ‘장그래’를 살리기 위해 민주노총이 무엇을 할지 고민했고 내년 1월부터 민주노총 총파업이 시작된다. 투쟁본부체계로 강화할 것이며, 장그래살리기 국민운동본부를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만들면서 민주노총이 한국사회를 제대로 견인할 것”이라며 “전체 노동자 민중을 대표하는 민주노총 투쟁에 언론도 순기능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물고 물린 입장 차
박성식 대변인 역시 “비정규직 기간 제한법은 2년이 됐을 때 사실상 지속업무이기 때문에 정규직화 되어야한다는 취지인데, 정부안 종합대책은 이러한 법의 취지를 차단하는 동시에 비정규직을 양산해내는 부정적 효과를 나타낸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핑계로 전체 노동시장의 하향평준화를 노리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도 마찬가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노동조합의 양대산맥이 모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한국노동조합은 성명을 내고 “정부가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늘리고, 정규직의 임금체계와 고용을 유연화 시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을 발표하고 노사정위원회에 논의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강훈중 한국노동조합 대변인도 “수차례 지적했듯이 비정규직 사용기간 2년 연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의 시간을 2년 연장할 뿐”이라면서 “정규직을 써야할 일자리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용역과 사내하도급으로 위장해 노동자를 사용하는 것을 막아야지 파견업종확대로 문제를 풀겠다는 것은 전형적인 경영자 봐주기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경영자나 재계 역시 정부안과 관련해 부정적 입장을 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영계를 대표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번 대책과 관련해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를 위한 정부의 오랜 고민의 결과로 알고 있으나 결과적으로 비정규직의 범위를 과도하게 넓히고 비정규직 고용에 대한 규제만을 강화하면서, 사실상 고용의 주체인 기업의 사정과 노동시장의 현실은 도외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 역시 “문제는 정규직 고용에 대한 과보호와 연공급제에 따른 과도한 임금인상에 있고 ,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처우 개선을 기대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한편 이들의 대립은 노사정위원회의 협의에 따라 결판이 날 공산이 크다. 다만 정부 대책에 재계와 노동계 모두 불만을 나타내는 상황이라 오는 3월로 예정된 합의 시한까지 노사정위원회의 협의는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노사정위원회는 이들의 대립을 두고 최대한 많은 목소리를 듣겠다는 견해다. 노사정위원회 관계자는 “정규직 종합대책안은 말그대로 초안이고 확정안이 아니다”라면서 “노동계나 경영계 역시 초안이 나온 상태로 향후 각각의 안을 동등하게 두고 합의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 “당연히 정부 초안의 세부 내용이 변경될 수 있다”라며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포함해 불공정거래, 통상임금 등 결정해야 할 의제를 모두 협의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비정규직 종합대책이 여타 의제들과 ‘주고 받기’가 성사될 가능성도 내비쳤다.
한마디로 패키지 ‘딜’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부분인데 “협의의 단계에서 협상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면서 “예를 들어 통상임금을 주고 비정규직 대책을 받는다거나 하는 등 각 계의 입장에 따라 협상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국의 장그래들이 들고 일어난 가운데 노사정위원회가 모두를 만족시키는 협의안을 찾을 수 있을지, 반대로 드라마 속 장그래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만으로 끝나게 될지 세간의 관심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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