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부 들어서자 안기부 구조조정
2008-12-02 김기삼
그는 자신의 영어 실력이 “부산에서 중학교 다닐 때 배운 게 전부"라고 늘 겸손해 했다. 신 과장은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공보비서실에서 일했다고 했다.
5공 때 청와대의 영문 자료는 모두 그가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우리말 보고서도 빼어나게 잘 썼다.
우리가 올린 보고서의 초안이 그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기가 막히게 잘 된 보고서로 변해서 나오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신의 손’이라고 불렀다. 그 만큼 보고서를 잘 손질해 줬다는 말이었다.
그는 청와대에 근무할 때 안기부 간부들이 부러웠다고 했다. 5공 시절에는 안기부의 과장급 간부에게도 관용차가 지급되고 직접 청와대에 들어가 보고도 하고 그랬다고 했다.
그는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자원하여 안기부로 옮겨왔다고 했다. 그는 아무런 인맥도 연고도 없었지만 실력 하나로 남들보다 빨리 승진했다.
당시 정협과 1계장은 내가 노벨상 공작에 관한 글에서 밝힌 박경탁 씨였다.
그는 본래 외사국 출신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도미니카에 파견관을 나갔다가 귀국한 후 정협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정협과 1계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미 CIA와 정보협력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박경탁 계장은 CIA와 모든 정보협력을 관장해야 할 직책에 앉아 있었는데, 능력이 안돼서인지 아니면 성의가 없어서인지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제대로 일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보다 나이 어린 상관 밑에서 일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하루 종일 영자신문의 간지를 보며 소일했다.
그래서 CIA와의 정보협력 업무는 박 계장 대신, 7급 직원에 불과했던 팀원이었던 박 모 선배가 거의 도맡다시피 하고 있었다.
정영철 국장은 박 계장이 자기의 고대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일도 열심히 않는 데다,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신 과장은 그런 박 계장을 과장으로 진급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신 과장의 후원 덕분에, 박 계장은 막차로 간신히 지원조정과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운명이란 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지난 98년, 정권이 바뀌자 모든 것이 역전되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신 단장을 구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내쫓듯이 그를 UN 공사로 내 보냈다. 마침 박경탁 과장도 뉴욕 참사로 발령이 났다. 직급상 엄연히 신 공사가 상관이고 박 참사는 아랫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겐 직급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내가 확인한 얘기는 아니지만, 박 참사는 신 공사에게,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죽은 듯이 지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가 실세이니, “설치지 말고 알아서 처신하라"는 경고였던 셈이었다. 권력의 비정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박경탁 참사, 해외공작 성공후 국장 승진
그 후 박경탁 참사는 워싱턴으로 옮기더니, 지난 99년 9월경 갑자기 단장으로 승진해 본부로 들어 왔다. 그는 2001년 4월, 중요해외 공작을 성공시킨 후 국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승진은 계급 연한조차 채우지 않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박경탁씨의 이례적인 진급은 문민정권의 오정소 차장의 진급만큼이나 파격적인 것으로, 언젠가 시사저널에서도 약간 소개된 적이 있다.
그 후 그는 노무현 정권에서 이스라엘 대사로 나갔다.
박경탁 계장의 후임으로 정협과 1 계장으로 온 분은 김 모 계장이었다. 신 과장이 단장으로 진급한 후 그는 후임 정보협력과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이 분은 계속 신 과장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노무현 정권에서 신 공사에 이어 워싱턴 공사(관리관)를 지냈다. 내가 이 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분의 인품을 좀 소개하고 싶기 때문이다. 흔히 공작국 요원들은 스스로를 비하하여 “썅캐”라고 부른다.
아마도, “상놈의 개새끼"라는 말의 줄임말일 것이다. 험한 일을 하다 보니, 그런 자조적인 말이 생겼다.
김 계장은 이런 험악한 여건에서도 온전한 인격을 보존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나는 해외공작국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인격이 꼬이고, 비틀어지고, 이상해져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평생 남의 뒷꽁무니나 캐고 다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 계장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각설하고, 정보협력과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국정원장과 차장 등 간부들의 해외 출장을 준비하는 일과 외국 정보기관의 간부들을 방한 초청하는 일이었다.
외국 정보기관과의 정보협력 채널을 새로 구축하거나, 기존의 정보협력 채널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외국 정보기관의 간부를 방한 초청하는 사업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초청교섭은 해당국에 파견된 파견관들이 직접 하지만, 일단 초청이 되어 국내에 들어오면 정보협력과에서 모든 행사를 주관했다.
보통 외국 정보기관 고위 인사들의 초청 목적은 원장과 차장과의 접견을 주선하는 것이었지만, 향응과 접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정보협력과 요원들은 이들의 방한행사를 기획하고 가이드 노릇까지 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