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원장이 ‘노련한’ 변호사의 책략에 넘어간 것”
2011년 박원순 vs 안철수 시장후보 담판 비사
[일요서울 | 류제성 언론인] 2011년 9월 6일 오후 2시 박원순 변호사(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이 장소는 ‘시골의사’로 유명한 박경철 안동신세계클리닉 원장이 마련했다. 박경철 원장과 박원순 변호사 측 윤석인 희망제작소 부소장이 배석했다. 박 변호사와 안 원장 가운데 누가 다음달 26일 치러지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설지 담판을 짓는 자리였다.
먼저 박원순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왜 서울시장직에 도전하려고 하는지, 서울시장이 되면 시정(市政)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를 10분가량 설명했다. 안철수 원장과 배석자들은 진지하게 경청했다.
박원순 변호사의 포부 설명이 끝나자 안철수 원장이 딱 몇 마디 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제가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박 변호사님을 잘 아는 사람이니까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변호사님의 의지가 얼마나 굳건한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담판은 단 20분 만에 끝났다.
두 사람은 오후 4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박원순 변호사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안철수 원장은 “박원순 변호사가 우리 사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시민사회 운동의 새로운 꽃을 피운 분으로, 서울시장직을 누구보다 잘 수행할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 서울시장 보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서울시장 후보군 가운데 압도적 1위를 차지했던 안철수 원장이 왜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했을까. 그 때 안철수 원장은 50%대의 높은 지지를 받은 반면, 박원순 원장은 5%대 지지에 그치고 있었다.
당시의 유력한 해석은 ‘박-안 밀약설‘이었다. 두 사람이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안철수 대선후보‘로 역할분담을 했다는 추측이었다. 안 원장은 “2012년 대선 출마에 대해선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철수 원장은 2012년 대선 출마를 시도했다가 막판에 민주통합당(현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끝에 포기했다.
최근 필자와 만난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당시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기 위해 치밀한 전략을 짜고 안철수 원장을 설득했다. 정치적으로 ‘순진한’ 안철수 원장이 ‘노련한’ 박원순 변호사의 책략에 넘어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본인이 만든 희망제작소의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지방자치 교육 프로그램을 집중 설명했다고 한다. 자신이 일본 수도 도쿄 등을 방문해 시정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연구해 왔고, 서울시정을 잘 이끌 자신이 있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또 차기 대권 경쟁 구도에 대한 구상을 밝히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안철수 원장은 박원순 시장의 ‘준비된 시장 론’ 설파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뒤 후보직을 양보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박원순 변호사가 지방자치 프로그램을 운영하다가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안철수 원장은 고도의 술수에 넘어 간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서울시장이 된 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마음으로는 안 되는 운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두고는 차기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란 해석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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