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성 고속도로 의문사’ 미스터리 추적
119에 다급한 구조요청 “왜”
2008-05-07 이수영 기자
휴일 아침, 고속도로 갓길에서 발견된 두 남성의 시신을 놓고 갖가지 의혹과 추측이 꼬리를 물고 있다. 제2중부고속도로 하행선 경안나들목 근처에서 비상등이 켜진 뉴그랜저 승용차가 발견된 것은 지난달 27일 아침 7시 40분쯤. 차 안에는 이비인후과 의사 김모(50)씨와 골프의류업체 대표 박모(48)씨가 나란히 숨져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강원도 원주로 골프를 치러가던 길이었다. 또 두 사람의 타액과 발견된 음료수병에서 수면제와 신경안정제가 발견돼 경찰은 이들이 약물중독으로 숨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약물을 복용한 이유와 정황이 드러나지 않아 사건은 미궁에 빠질 위기다. 동기도, 이유도 없는 두 남자의 이상한 죽음. 사건에 얽힌 미스터리를 집중 추적했다.
경찰은 두 남자의 죽음이 약물 복용으로 인한 중독 또는 쇼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숨지기 전 이들이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흔적을 찾았기 때문이다. 시신이 발견된 차 안에서 두 사람이 마신 것으로 보이는 커피음료와 구토 흔적이 발견됐다. 국과수 검사 결과에 따르면 반쯤 남아있던 커피음료와 용기에서는 독극물을 포함, 어떤 약물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구토물에서는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성분이 검출됐다.
또 숨진 김씨가 휴게소 화장실에 들러 버린 것으로 보이는 홍삼음료병에서도 두 사람에게서 나온 것과 같은 약물이 나왔다.
두 남자 사인은 제3의 약물?
이들에게서 검출된 약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신경안정제 일종인 ‘클로티아제팜’으로 불안증을 치료하는데 쓰인다. 나머지 하나는 ‘졸피뎀’이라는 이름의 수면제다. 두 약물 모두 중추신경을 억제하는 작용을 해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되지만 의사 처방만 있으면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이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복용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발견된 약물의 양이 많지 않아 불과 10여분 만에 두 명이 목숨을 잃을 만큼 강력한 독성을 지녔다고 보긴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맡은 경기광주경찰서는 숨진 두 사람이 ‘제3의 독극물’이나 약물을 복용했는지 여부를 놓고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정확한 사망원인과 함께 두 사람이 고속도로위에서 수면제를 복용한 이유도 드러나지 않았다. 김씨와 박씨는 이날 또 다른 동창 2명과 함께 강원도 원주에 있는 O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길 예정이었다. 박씨 이름으로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였고 36홀을 돌며 5시간 넘는 긴 라운딩이 계획 돼 있었다.
두 사람이 경기를 앞두고 긴장을 풀기위해 신경안정제를 복용했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지만 운전 중 수면제를 섞어 먹은 이유는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특히 숨진 김씨는 현직 의사로 약물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김씨가 약물을 후배에게 권한 것은 나름의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게 수사팀 내부 의견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이들이 동반자살을 기도했을 경우다. 두 사람이 함께 탄 차는 제3자의 침입이나 범죄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지갑이나 귀중품이 사라진 정황도 없어 이들이 강도나 절도 피해를 입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족들이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경찰 수사 과정에서도 특별한 동기가 드러나지 않아 의문은 점점 커지고 있다.
김웅기 경기광주서 형사과장은 “(두 사람 모두)돈 문제나 특별한 사항은 없다. 친구들, 선·후배들을 상대로 탐문 수사를 진행 중이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자살계획을 세운 사람이 또 다른 친구들과 함께 골프약속을 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라는 점에서 자살 가능성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때문에 두 사람이 제3자에게 살해됐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누군가 두 사람에게 수면제를 강제로 주사했거나 음료에 섞어 먹인 뒤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란 추측이다. 하지만 숨진 박씨가 직접 119에 구조요청을 해온 점, 휴게소 CCTV 판독 결과 제3의 인물이 있었다는 정황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으로 미뤄볼 때 이 같은 가설도 완벽하지 않다.
경찰은 이들의 죽음이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사고였을 것에 무게를 싣고 있지만 자살과 타살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숨진 두 사람에게 사건 당일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들의 행적은 사건의 미스터리를 푸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다. 행적이 처음 확인된 것은 선배 김씨다. 김씨는 이날 새벽5시쯤 집을 출발해 근처 편의점에서 커피음료 두 개를 구입했다. 편의점 CCTV에 김씨가 찍힌 시간은 오전 5시 8분.
김씨는 곧장 서울 도곡동으로 가 후배 박씨를 만나 함께 차에 탔다. 이들은 6시12분 중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주유소에 도착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김씨가 손에 흰 비닐 봉투를 들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모습이 CCTV에 잡힌 것. 화장실을 다녀온 김씨는 빈손이었다.
김씨, 주사기 챙긴 이유는?
경찰은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문제의 봉투를 찾아냈고 그 안에서 수면제가 든 홍삼음료병 2개가 발견됐다.
또 봉투가 버려진 곳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김씨의 DNA가 묻은 주사기가 나왔다.
이 주사기는 김씨가 전날 자신의 병원 간호사에게 부탁해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김씨가 음료수에 수면제를 넣기 위해 주사기를 사용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약물을 직접 피부에 주사했는지 여부를 밝히기 위해 국과수에 정밀감식을 의뢰한 상태다. 보름 이상 걸릴 것으로 보이는 국과수 감식 결과에 따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다시 차에 오른 두 사람은 휴게소를 떠난 지 3분 만에 동서울 요금소를 통과했다. 그리고 15분 뒤인 6시 30분 119 구조대로 운전자 박씨의 구조요청이 접수됐다. ‘약물중독으로 아프다. 숨을 못쉬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구조신호를 보낸지 1시간 뒤인 오전 7시 38분 이들은 모두 숨진 채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