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태안을 죽였는가… ‘책임 공방’

2007-12-21     이수영 기자

태안 원유 유출 최악 인재(人災) 따진다

2007년 12월 대한민국 서해안은 전쟁터다. 지난 7일 오전 7시 15분 충남 태안군 만리포 북서방 5마일 해상에 정박 중이던 홍콩선적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와 삼성중공업 소속 해상 크레인을 실은 부선이 부딪히며 유조선 오일탱크 3곳에 구멍이 나
8000톤의 원유가 바다에 흘러들었다.

지금 태안엔 ‘재앙’만 있고 ‘책임’은 없다. 사고 당사자인 삼성중공업과 유조선, 대산지방해양수산청 관제실은 서로 발 빼기 공방을 뜨겁게 벌이고 있다. 경찰수사가 몇 주째 이어졌지만 ‘피의자’ 신분으로 바뀐 사람이 한명도 나오지 않는 ‘이상한 사건’이다. 드넓은 서해와 어민까지 살해된 ‘뻔뻔한 삼자대면’을 집중 취재했다.


해경, “삼성重 책임 더 크다”

경찰이 파악한 사건의 쟁점은 세 가지다. △삼성중공업 예인선이 풍랑주의보에서 무리하게 운항했는지 △관제실과 예인선 · 유조선 교신은 왜 늦어졌는지 △관계자들이 안일하게 대처했는지가 집중 수사대상이다.

해경은 일단 예인선이 이번 사건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지난 12일 최상환 해양경찰서장은 “충돌을 피하려는 책임은 모두에게 있다. 하지만 서있는 차를 움직이는 차가 들이받으면 과실은 당연히 움직이는 쪽이 크다”고 말해 예인선 책임을 꼬집었다.

한편 해경수사를 받고 있는 유조선 쪽(허베이 스피리트호)과 예인선 쪽(삼성중공업)은 각각 ‘김앤장’과 ‘광장’을 법률대리인으로 선임했다.

피해어민들에게 줘야할 피해보상금이 최대 3000억원에 이르는 만큼 이번 사건의 진실공방전은 매우 치열해질 전망이다. 게다가 청와대는 해양수산부의 대응방식을 놓고 ‘두고 보자’며 벼르고 있다. 세 당사자의 운명은 풍랑 속에 던져진 조각배만큼이나
처절하다.


사건 2시간 전 위험 알아

태안 원유 유출사고의 전말은 이렇다.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지난 7일 새벽. 대산지방해양수산청 관제실은 대형 크레인을 끌고 가는 예인선 두 척이 정박 중인 유조선에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오전 5시 23분 관제실은 무선으로 예인선을 긴급 호출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오전 5시 50분 두 척의 예인선이 항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30분 뒤인 6시 20분. 관제실은 예인선 선장의 휴대폰으로 ‘대형
유조선이 근처에 있으니 피해 가라’고 경고했다. 6시 27분엔 유조선을 호출, 크레인선과의 충돌위험을 알렸다. 3분 뒤 예인선도 유조선에 연락해 ‘예인선과 크레인선을 잇는 쇠줄이 끊어졌다. 피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7시 15분 3000톤의 크레인 선이 유조선을 덮치는 두 번의 굉음과 함께 일은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크레인선 주인인 삼성중공업은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리어카를 몰던 사람이 고갯길에서 미끄러져 길 아래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외쳤지만 쳐다보기만 하다 다친 꼴”이라고 비유했다. 그는 또 “유조선도 잘못이 크다. 충돌 40분 전부터 관제실, 예인선, 유조선간 교신을 통해 안전조치를 취해 줄 것을 몇 번이나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삼성은 사고의 직접 당사자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중공업은 쇠줄이 관제실과 첫 교신한 6시 20분엔 끊기지 않았다고 진술했지만 10분 뒤 직접 유조선에 연락, ‘쇠줄이 끊어졌으니 안전장소로 피하라’고 요청한 사실이 확인됐다.

관제실과 예인선 선장의 통화가 있은 뒤 1시간이면 유조선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쇠줄이 끊어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역시 관제실에 보고했어야 했다. 그러나 삼성은 하지 않았다.


유조선, ‘서있는 차 들이받은 격’

유조선 쪽은 사고당일 보도자료를 통해 “대산지방해양수산청이 지시한 곳에 머물며 규정대로 정박감시와 신호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또 “예인선이 다가와 위험하다는 것을 파악, 통신을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관제실을 통해 다시 연락을 취했지만 예인선이 유조선 뱃머리로 향했다”고 밝혔다. 또 “길이 338m에 이르는 대형 유조선을 움직여 피하기엔 시간이 없었다”며 사고는 ‘불가항력’이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경찰조사결과 사고 2시간 전부터 유조선은 관제실의 경고교신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대형 닻을 올리고 시동을 걸어 옮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경고를 무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체 레이더로 크레인선 접근을 알고 있었음에도 배 앞쪽의 닻을 올려 수십m를 이동했을 뿐 “크레인선 통과 뒤 옮기겠다”며 자리를 지킨 것으로 드러났다.




관제실, ‘선박에 정보만 줄뿐’

대산해양수산청 관제실 역시 사고발생의 한 축이다. 일찌감치 예인선의 항로이탈과 충돌 위험을 파악하고 두 번이나 호출, 휴대폰으로 경고까지 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때 크레인은 경고에도 항로를 크게 벗어나 유조선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대산해양수산청 관계자는 “관제실은 선박에게 정보를 제공할 뿐 항로를 지시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또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상황에서 3000톤이 넘는 거대 크레인의 운항을 왜 허용했는지도 의문이다. 여기에 현지어민들 주장은 해양수산청을 더욱 궁지로 몰고 있다. 어민들은 “사고를 낸 유조선이 해양수산청이 고시한 곳에서 3마일이나 떨어져 정박해 있었다”며 사고지점을 오가는 배들과 충돌위험이 있어 단속해주길 건의했지만 당국이 무시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