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으로 전락한 음악가 “도박 때문에”
한 클래식 연주자의 ‘인생 막장’
2007-12-20 이수영 기자
명문 S대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유학까지 다녀온 클래식음악가가 도둑으로 전락했다. 대구시 달서경찰서는 최근 대리운전을 하다 2년 동안 11차례에 걸쳐 손님의 금품을 훔친 혐의로 클래식음악가 출신 한모(47)씨를 구속했다.
한씨는 시립교향악단 단원과 대학 강사로 입지를 다져온 정통파였지만 도박의 늪은 유능한 예술가의 날개를 꺾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뒤 정선카지노와 ‘바다이야기’에 빠져 수억원의 빚을 졌고 마침내 동료음악가였던 부인에게까지 버림 받은 한씨. 직장도, 집도 잃은 뒤 먹고살기 위해 대리운전에 뛰어든 그는 쪼들리는 생활고를 이겨내지 못해 절도행각을 벌인 것이다. 한씨는 결국 경찰에 덜미를 잡혀 차가운 감옥신세를 지게 됐다. 상류문화를 누리던 음악인에서 나락으로 파고든 한 남자의 인생막장을 들여다보자.
“물병 하나 훔친 것까지 다 고백했습니다. 죄 값을 치르고 깨끗하게 살고 싶습니다.”
잘 나가던 트럼펫연주자에서 절도범으로 전락한 한씨는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다. 지난 2년간 그가 훔친 금품은 4000만원대. 경찰은 지난 2일 한씨를 구속하며 그가 훔쳐 몰고 다닌 렉스턴승용차와 가짜 번호판 4개도 압수했다.
한씨가 처음 절도행각에 나선 건 2006년 1월. 카지노에서 다른 손님들 돈과 상품권을 훔치는 모습이 도박장CCTV에 잡히면서 전과자 꼬리표를 달았다. 경찰에 붙잡힌 한씨는 지난해 12월 감옥을 나왔지만 삶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오스트리아 유학파 대학 강사
누구보다 화려한 시절이었다. 명문 S대 음대를 나와 1997년 오스트리아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씨. 그는 D시립교향악단에서 트럼펫연주자로 활동하며 대학 강단에 서기까지 했다. 역시 교향악단 연주자인 아내와 세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기도 했다. 지난날 한씨는 행복했다.
그러나 한국땅에서 발을 들인 도박판은 그의 인생을 조금씩 좀먹기 시작했다. 1997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선배음악인들에게 인사를 다니던 한씨는 단골이던 악기사를 통해 도박판에 끼게 됐다.
도박은 음악만 알던 한씨에게 엄청난 자극이었다. 점점 판에 끼는 날이 많아졌고 판돈은 커졌다. ‘잃은 만큼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그는 악단도 팽개치고 놀음에 빠졌다.
2000만원 전세집도 넘어가
물론 연습과 공연에 수시로 ‘땡땡이를 치는’ 한씨를 악단에서 그냥 두고 봤을 리 만무했다. 결국 사채까지 끌어다 쓴 탓에 2억원의 도박 빚을 떠안은 그는 2005년 직장에서 쫓겨났다. 퇴직금은 모조리 빚 갚는데 쏟아 부었다. 하지만 6500만원이란 거액의 빚더미가 남았다.
결국 다른 교향악단 연주자로 활동하던 아내(45)마저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남은 빚을 갚아야했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한씨. 카지노와 바다이야기에 빠져 도박판을 전전하는 남편을 못 견딘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이미 2000만원짜리 전세방마저 도박빚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2006년 모든 것을 잃은 한씨는 밥벌이를 위해 택시운전과 대리운전기사로 나섰다.
그러나 돈만 손에 쥐면 그의 머릿속은 온통 도박 생각밖에 없었다. 도박장을 맴도는 그의 생활은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난 1월 한씨는 대구 성서지역의 한 성인오락실에서 다른 손님들 돈과 상품권을 훔치는 모습이 CCTV에 찍혀 지명수배자 신세가 됐다.
경찰추적 피해 계속 범행
한씨의 도피생활은 올 한 해 계속됐다.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대리운전기사로 일하며 대구시내를 떠돈 그는 경찰검문을 피하기 위해 다른 차의 번호판 4개를 훔쳐 달고 다녔다. 그리고 도박자금 마련을 위한 도둑질도 멈추지 않았다.
한씨는 지난 3월 초 대구시 북구의 한 식당 앞에서 대리운전을 부르고 시동을 켠 채 기다리던 김모(60)씨의 렉스턴승용차를 훔쳐 최근까지 몰고 다녔다. 술에 취한 손님들이 차안에서 잠들면 그들의 지갑을 터는 정도는 일상의 일이 되었다.
그는 또 지난 11월 22일 오전 1시쯤 대구 달서구의 한 노래방에서 전모(41)씨 의뢰를 받고 대리운전을 하던 중 전씨가 잠든 틈에 콘솔박스에 있던 주유상품권 20만원 어치와 신용카드를 훔쳐 쓰기도 했다. 결국 한씨의 도피행각은 전씨 신고로 1년 만에 막을 내렸다.
“깨끗하게 살고 싶다” 후회 눈물
1년간의 도피생활을 끝낸 한씨는 뒤늦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경찰조사에서 “도박 때문에 음악인으로서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 정말 후회스럽다. 물병하나 훔친 것까지 모두 진술했으니 죄 값을 치르고 싶다”고 말했다.
경찰은 추가조사를 거쳐 한씨를 검찰로 넘겼다. 사건을 맡은 경찰관은 “한때 상류층 생활을 했던 사람이 도박으로 망가진 모습이 안쓰럽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